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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을 바라보는 차가운 눈
얼마 전 스터디 모임에서, 그리고 연휴 때 고등학교 동창들과 가진 술자리에서 내가 절실히 깨달았던 것은 내 가치관이 내 세대의 보편적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성장'과 '분배'의 우선순위를 향한 돌고 도는 토론 속에서 난 '분배'를 우선하는 소수자였다. 내 생각이 이 시대 20대들의 보편적인 생각이라 치부해왔던 나에게 토론 끝에 찾아온 충격은 더욱 컸다.

돌고 도는 토론이었지만 나에게는 의미 있는 것이기에 그저 흘려 보내고 싶지 않았다. 이 때문에 이 공간에 그간 내가 풀어놨던 이야기들과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정리하기로 했다. 물론 이 글을 쓰는 내 의견 중심으로 기술되는 것은 나도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아는 것이 워낙 적고 일관된 논리로 풀어내는 것이 내 능력으로는 불가능한 소재를 다룬 글이니만큼 글이 불완전하다는 것을 전제로 전개할 것이다. 당연히 이 글의 불완전성을 보완해 줄 반론과 첨언 역시 언제든 환영이다. 참고로 이 글에서 삼성이 주된 안주로 등장하는 것은 우리나라 재계 1위라는 상징성 때문이지, 다른 사사로운 감정은 없다. 만약 시계를 6~7년 전으로 돌려놓는다면 이 글의 주인공은 분명 '현대'였을 것이다.


1. 허상속에서의 삶, 삼성이 망하면 한국은 망한다.

삼성이 재계 1위로 올라선 것은 현대의 해체 이후부터다. 물론 정확한 자산규모나 수출액 등의 객관적 자료를 살펴보면 그 결과가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객관적 자료와 함께 우리 국민들의 뇌리에 자리잡은 네임밸류(name value)까지 고려한다면 순위에 대한 논란은 더 이상 필요치 않으리라 생각한다.

우선 현대의 논리에 따르면 60~70년대 우리나라의 발전에 있어 현대의 기여는 상당부분이었고 결국 현대는 그 이후 한국을 대표하는 그룹으로 자리잡았다. 우리에게 '망해서는 안되는, 망할 리 없는' 그룹 현대, 그러나 IMF 전후로 계열사의 부실에서 시작된 현대그룹의 위기는 결국 그룹 해체로 결론지어졌다. 이렇게 해체된 현대와 대우 사이에서 살아남은 삼성과 LG는 이 이후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기업으로 자연스레 자리잡게 되었다.

굳이 현대부터 이야기를 시작한 까닭은 국가를 이끌어가는 그룹이라는 그 '절대적 믿음'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서다. 현대의 해체와 같이 삼성 역시 언제 몰락할지 모르는 재벌 중 하나일 뿐이며 그룹 현대가 없는 지금의 우리나라처럼 그룹 삼성이 없는 우리나라 역시 상상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다. 그 경제적 영향력은 상당한 정도지만 역으로 그렇다고 해서 국가를 흔들 만큼의 것인지 또한 확실하지 않다. 단지 지금 걷고 있는 '삼성전자'라는 기업 하나의 성공을 통해 삼성그룹 전체의 성공으로, 그리고 그 성공이 마치 대단한 것인 양 우리에게 부풀어 인식되어 있을 뿐이다. 자그마한 요인들을 차치하면 삼성그룹이 IMF를 무난히 넘길 수 있었던 것은 '삼성생명'이라는 최고의 현금창고 덕분이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런 이들에게 '우리나라의 운명이 걸려 있다.'고 운운하는 것은 우리나라, 그리고 우리 자신을 너무 하향평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2. 벗어나기 힘든 자본주의의 틀, 삼성 덕에 이만큼 먹고 산다.

흔히 박정희의 독재에 대해 비판할 때 가장 약해지는 부분이 '경제발전'을 논할 때이다. 그의 무수한 비민주적 행위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우리나라의 많은 장년층들은 그의 독재 덕분에 우리가 지금 수준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여기고 있다. 이는 또한 경제 분야의 전문가들 조차 어느 정도 인정하고 있는 사실이다.

이에 대해서 완전히 부정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군사독재 시대에 온갖 특혜를 통해 성장한 재벌들의 빠른 성장으로 우리의 삶이 급속히 윤택해졌음은 물론, 우리나라의 위상 또한 높아질 수 있었다. 지금 우리나라가 가진 세계 12위 무역국의 위상에 그들의 노고(?)는 상당부분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리고 분명 지금 우리나라는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부국이 되었다.

하지만 지금 우리 사회로 눈을 돌려보자. 각종 사회지표는 60~70년대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빈부격차를 드러내고 있고, 거리에는 여전히 노숙자들과 노점상인들이 즐비하다. 분명 잘사는 사람들은 과거보다 훨씬 많은 부를 움켜쥘 수 있었지만 생활고에 찌든 서민들은 여전히 찌들어 있다. 자본주의 논리는 우선 빵을 크게 키워야 그 빵을 나눠먹는 사람들에게 돌아가는 빵의 양 또한 늘어나 결국 모두가 배부를 수 있다는 것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그간 서민들의 피땀을 들여 크게 키운 빵이 원래 배부른 사람들이 더 가져가고 못 먹는 사람들은 여전히 못 먹어 결국 배부른 사람은 더욱 배불리, 그리고 배고픈 사람은 여전이 배고픈 것이 지금 우리의 현실이다. 과연 얼만큼 성장을 해야 분배하겠다는 이야기인지 나는 더 이상 납득이 가지 않는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아무튼 과거보다 잘 사는 거 아니냐' 라고 되묻는다면 할 말 없다. 하지만 '과거보다 부유하게 된 덕분에 우리의 삶은 그만큼 더욱 행복해졌는가?'라고 물으면 어찌할 것인가?

세계에서 손꼽히는 빈국 방글라데시의 국민들이 전 세계에서 가장 행복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다는 연구결과와 월드워치의 연례보고서에서 '세계는 점점 부유해지고 있지만 점점 불행해지고 있다'는 연구결과는 무엇을 이야기하는가. 세계 최대강국 미국 국민 중 겨우 1/3만이 행복하다고 느끼는 것은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자본주의 논리 속에서 설명 불가능한 결과들이 계속해서 우리에게 나타나고 있다. 우리가 가진 사고의 틀 내에서는 도저히 설명 불가능한 일들일 뿐이다.

우리에게는 이미 '자본주의'가 가장 당연한 논리가 되어 있다. 막스베버가 '프로테스탄티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언급했듯이 부의 축적만이 선일 수 있는 자본주의 아래에서 우리는 앞으로만 달려가고 있다. 일본처럼 경제대국이 되어야 행복한 국민이고 TV에 항상 등장하는 호화찬란한 생활을 누릴 수 있어야만 행복한 사람이라 여기고 있다. 허울좋게 세계화란 탈을 쓴 미국화, 서구화가 빨리 되어야만 왠지 행복하게 될 것 같은 느낌. 이미 우리는 자본주의가 짜 놓은 판 속에서 움직이는 말처럼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자본주의의 울타리 안이다. 왜 그들이 세워놓은 질서에 편승해야 당연한 것인지를 돌아볼 수 없는 판 위의 말, 아무런 생각 없이 다른 이들이 정해놓은 규칙에 의해 움직이고 따라야만 하는, 판이 잘못된 것은 아예 볼 수 조차 없는 판위의 말이 우리라는 생각은 할 수 없는가.


3. 성장이데올로기에 멍들어가는 사회, 삼성이 없다면?

흔히 기업의 위대함을 논할때, 핀란드의 노키아를 이야기하곤 한다. 실제로 노키아는 핀란드 GDP의 약 1/4를 차지하고 있고, 기업이 국가 경제를 이끄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하지만 반대로 보자. 미국의 IBM, 코카콜라, 나이키가 없다고 미국이 망하는가. 이탈리아의 페라리나 알마니, 스위스의 스와치, 스웨덴의 볼보가 없다면 국가 유지가 힘들었을까? 이러한 대표적인 브랜드조차 소유 못한 노르웨이, 유럽 최고의 부국 룩셈부르크, 벨기에는? 대만과 싱가포르, 홍콩은? 뉴질랜드는? 단적으로 말해 핀란드와 같은 경제구조의 국가는 흔한 경우가 아니다.

비약이 심했는지 몰라도 우리와 비슷하거나 선진국인 국가들은 재벌들에 의해 이끌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그 여력이 여러 갈래로 분산되어 있어 보다 안정적인 경제모델을 추구한다. 아예 중소기업을 통해 경제적 성장을 이룬 대만과 같은 경우도 있다.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삼성이 가져다주는 노획물 덕분에 우리는 보다 더욱 거기에 의지하려는 심리, 이 때문에 '절대적 믿음'을 더욱 키워가는 우리의 태도이다. 이 절대적 믿음 덕분에 그들이 동시에 가져온 온갖 부작용들은 그저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너그럽게 넘어간다.

재벌들에게 몰아준 특혜는 그들 이외의 많은 중소기업들의 독자적인 성장을 불가능하게 했고, 이 덕분에 지금의 수많은 중소기업들은 재벌들에 철저히 종속되어 있다. 그리고 재벌은 중소기업에 더욱 착취를 하여 이러한 구조를 더욱 심화시킨다. 그리고 이를 통해 무분별한 성장을 시도하고 결국 그 부실한 성장 덕분에 무너진 재벌은 그에 종속될 수 밖에 없던 중소기업까지 줄줄이 도산시켜 국민들의 막대한 세금을 쏟아 부을 수 밖에 없었다. 이렇게 재벌 의존 일변도의 우리의 경제구조는 결국 자립적이기보다는 서로 물고 물리는 구조를 형성하게 되었고, 이 때문에 고리 하나가 부실하면 전체가 무너지게 되는 기형적 구조가 되었다. 그 결과 우리 경제는 더욱 재벌의존적일 수 밖에 없다.

뿐만 아니라 이들 재벌은 정계, 언론계 등 사회 각 분야 고위층과의 네트워크를 형성하여 외적으로는 공정한 경쟁을 어렵게 했고, 내적으로는 각종 부정부패를 일삼아왔다. 이는 사회적 약자는 계속 약자일 수 밖에, 그리고 사회적 강자는 계속 강자일 수 밖에 없는 경직된 사회구조를 형성하였다. 한편 재벌의 성장을 근간으로 이루어진 국가경제의 급격한 성장은 물질적 변화를 문화적 변화가 따라가지 못하는 문화지체현상을 낳았고 이는 현재의 많은 사회문제-자살, 가족해체, 신용불량자 양산 등-를 낳는 계기가 되었다. 이는 사회 뿐 아니라 기업에도 마찬가지여서 기업 오너의 아들, 딸들은 기업의 요직을 차지하는 것이 당연시 될 정도로 '기업은 오너의 것'이라는 전근대적 마인드를 가진 경영자가 대부분이다. 결국 우리는 지금의 재벌을 만들지 않고 각 분야가 자립적이면서도 열린 구조로 만들어갈 수 있는 기회를 버리고 재벌중심의 경제체제를 비정상적으로 만들어왔으면서도 역설적으로 재벌들이 없으면 우리 경제가 위험하게 된다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4.  정치, 언론, 재벌의 도원결의

얼마 전 한-칠레간 FTA협정 통과를 두고 의원들간의 몸싸움을 볼 수 있었다. 그보다 앞서 국회 의사당 앞에서 연일 시위를 하는 농민들의 모습도 보였다.  이를 두고 언론들은 '국회의원의 금배지 놀음에 국가 중대현안이 중지됐다'고 국가에 큰 위기가 닥칠 것처럼 대서특필했고, 시위하는 농민들을 '자신의 이익만을 생각하는 집단'으로 몰아붙이기에 바빴다. 노무현 대통령은 FTA통과에 의원들의 협조를 부탁하기 위해 국회를 찾기도 했다. 이 상황에서 우리는 농민들을 '미리 예고해 줘도 대책 없이 손 놓고 있다가 자신의 이익만 찾으려는 집단'으로 볼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조금만 깊이 보면 다른 입장을 발견할 수 있다. 현재 우리나라의 농민층은 대부분 50대 이상의 장, 노년층이다. 평생 농사를 져왔고, 할 줄 아는 것이 그것뿐인데다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기에는 힘든 그들에게 10년 전에 예고해 준 것이 무슨 소용이겠는가? 그리고 문을 개방한 후에 때늦은 지원책이 무슨 도움이겠는가? 이 나라는 우리의 나라이며 동시에 그들의 나라이기도 한 것인데 무슨 권리로 그들에게 피해를 강요할 수 있는가. 우리가 그들의 입장이라면 '국가를 위해' 손해를 감수하겠노라고, 생존권을 내놓겠노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인가. 분명 FTA를 실시하려면 오랜 기간 그들의 자구책을 보조해주고 이를 어느 정도 완수한 다음 실시해야 당연한 것인데도 정부에서 손 놓고 있다가 지금 와서 서두르는 이유는 무엇인가? 분명 가장 큰 이유는 경제적 이득이다. 칠레의 값싼 농산물을 수입하고 기술적 후진국인 칠레에 고부가가치의 첨단제품을 수출하는 것은 어림셈해봐도 분명 이익이다. 그렇다면 이 이득의 대부분을 가져가는 것은? 물론 재벌이다. 가장 큰 이윤의 당사자 재벌, 시급히 FTA를 추진하려는 정부, 시위하는 농민과 몸으로 통과를 막은 의원들을 이기주의자로 몰아가는 언론. 이들은 과거부터 그래 온 것처럼, 여전히 서로의 본분을 망각한 채 비정상적인 도움까지 주고 받으며 절친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기에 이러한 우스운 상황이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 큰 연결고리는 간과한 채, 언론이 외치는 한 방향의 목소리만을 듣고 있다. 마치 시급히 통과하지 않으면 우리나라가 망할 것 같은 FTA, 하지만 체결하기로 한 이후 몇 년이 지난 지금까지 우리는 아무렇지도 않았고, 오히려 무역흑자만 늘려가고 있을 뿐이다.


5. 결론

내가 항상 당하는 반박은 현실을 너무 무시한다는 것이다. 물론 위 이야기를 피상적으로만 보면 그렇게 들릴 수도 있겠다. 하지만 중심내용은 당장 재벌들을 해체하자는 것이 아니다. 지금 우리가 걷고 있는 자본주의, 성장이데올로기의 틀에서 벗어나 생각해볼 줄도 알았으면 하는 것뿐이다. 경제력이 조금은 부족하다 해도 부자와 가난한 사람의 차이가 습자지 한 장 차이일 정도로 모두가 함께 나아지는 나라, 사람들의 의식, 문화의 변화가 함께 이루어져 당장의 경제력은 뒤쳐진다 해도 저력 있는 나라, 경제지수보다는 행복지수에서 보다 높은 나라가 오히려 바람직한 것이 아닐까? 삼성공화국 대한민국은 여러 갈래의 길 중 하나를 택했을 뿐, 그 길만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절대적'으로 옳은 것은 아니다.  그 길이 우리에게 절대적으로 옳은 것처럼 보이는 것은 '정치, 언론, 재벌이 꾸민 연극'만을 우리가 보아왔기 때문이다. 답답하고 고지식한 외길보다는 여러 갈래의 길을 닦아놓아 보다 행복하고 편안한 여행을 할 수 있는 것, 그것이 오히려 '절대적으로 옳은 길'이 아닐까 한다. 물론 이러한 넓은 시야가 사회 구성원들 모두에게 갖추어진다면 보다 융통성 있고 합리적인 구조로 우리 사회가 나아갈 것이라는 사실은 자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