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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 폭발[아는여자]

2004.08.02 23:28

TOTO 조회 수: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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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독 : 장진
출연 : 이나영, 정재영, 임하룡

여름, 우리 극장가가 태평양을 건너온 자본 가미가제 앞에 몸살을 앓는 계절이다. 스파이더맨2를 필두로 물 밀 듯 밀려 들어오는 블럭버스터에 제아무리 한국영화의 힘이 굳건하다 할 지라도 우리 영화들은 기 한번 제대로 펴지 못하고 주저앉고 말았다. '아는 여자' 역시 이러한 상황을 잘 아는지(?) 영화의 재미나 완성도가 채 알려지기도 전에 조용히 사그러드는 듯 했다. 그나마 TV에서 주말마다 방영되는 영화 프로그램을 빼놓지 않고 봤기에 내 입맛을 끌었고, 날 극장으로 인도한 것이 다행이랄까?

난 장진의 색깔을 잘 모른다. 그가 그간 연출했던 영화들(킬러들의 수다, 묻지마 패밀리 등)을 본 적이 없다. 아니, 정확히는 내가 보고 싶어 하기도 전에 조용히 사그러 든 영화만 연출을 했다. 다만 케이블의 영화 채널에서 간간히 보는 것들을 모아 보면 '호화캐스팅 + 뻔한 이야기'로 점철된 영화였기에 조용했을 뿐이라 추측만 할 뿐이었다.

이 영화의 색깔은 종잡을 수 없다. 설정을 봐서는 일상의 감각을 이끄는 능력이 탁월한 홍상수 같기도 하고(이웃에 살고 있는 오랜 짝사랑을 향한 한 여인의 일상), 전깃줄을 타고 사랑이 전달되는 유치찬란한 이야기와 전혀 현실성 없는 이야기를 그리는 것을 봐서는 공상과학을 추구하는 장준환 같기도 했다. 그리고 그 썰렁하면서도 웃지 않을 수 없는 유머는 박찬욱의 올드보이도 연상이 됐다. 그러나 영화는 이 모두의 혼합이면서도 동시에 나름대로의 기묘한 색을 연출하고 있다.

이 영화의 시놉은 어려서부터 이웃의 야구선수를 짝사랑 해 온 한 여자의 이야기다. 스토커처럼(그러나 다른 스토커와는 달리 그 사람의 일상에는 전혀 관여하지 않는) 그 남자의 일상을 따라온 여자, 애인에게 차인 후 사랑에 관해 끝없이 회의해 온 남자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상. 이 일상이 무슨 재미가 있을까마는 장진은 우리가 일상에 갖고 있는 사소한 감정들과 생각들을 낱낱이 까발려 관객들로 하여금 무안한 폭소(?)를 터뜨리게 하는데 성공했다.

캐스팅 과정이 궁금하다. 오직 카리스마로만 채워져 있는 정재영을 어떻게 이나영과 매치를 시켜 낼 수 있었는지 말이다. 이나영의 연기는 얼마전 MBC에서 방영된 '네멋대로 해라'와 크게 다르지 않다. 조금 엉뚱한, 그러나 지고지순의 사랑을 보여준 연기. 물론 나쁘다는 말이 아니다. 그 이후 싫던 이나영을 조금은 즐겁게 바라보기 시작했으니...... 그리고 이번 영화에서 이나영은 그 드라마에서 보여준 캐릭터를 완성한 듯 보인다. 너무나 인형같은 외모 때문에 얼마나 변신을 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지만 적어도 지금까지 보여준 캐릭터에 있어서 그녀보다 더욱 뛰어난 연기를 보여줄 연기자는 없을 것이다. 이름 붙이자면 귀여운 엉뚱녀?

정재영은 '실미도'에서 보여준 연기가 인상적인 배우였다. 뚜렷한 이목구비, 훤칠한 키, 잘빠진 몸매. 실미도에서는 그의 신체조건과 100% 이상 들어맞는 배역이였다면 이번 영화에서는 사실상 0%에 가까웠다. 하지만 오히려 그 점이 관객들에게 더욱 어필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카리스마로 점철된 인물이 여자친구와 헤어지는 현장에서 좀스럽게 자신이 차는 상상이나 하고, 강타자를 빈볼로 승부하려 했다는 이야기 앞에서 어찌 안웃을 수 있을까?

하지만 이 영화의 유일한 단점은 훌륭했던 연기, 코믹에 묻혀 정작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희미해졌다는 것이다. 영화는 처음부터 지독히도 묻는다. '사랑이란 무엇인가?' 그러나 그에 대한 감독이 말하는 바는 귀에 담기 힘들다. 들리는 듯 하다가 웃고, 또 들리는 듯 하다가 웃어야 했기에. 역시 사공이 많으면 배가 바다로 가긴 힘든가보다.

그렇지만 한여름에 '사랑이 무엇인가?'라고만 묻는다면 얼마나 맥빠질까? 결국 타인의 진단결과 때문에 벌어진 헤프닝에 그쳤지만 적어도 살아갈 날이 남아있는 자의 슬픔, 그리고 지울 수 없는 한사람을 향한 끝없는 사랑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다면 성공이다. 그리고, 평범한 일상에서 벌어지는 무안한 폭소를 터뜨리면 그만이다. 가끔은 영화인들의 작태에 실망을 금치 못하면서도 이런 썩 볼만한 영화가 헐리우드의 융단폭격에 조용히 '픽'하고 터지고 사그러들 때는 아쉽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