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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

주변을 바라보는 차가운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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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송 : KBS2 밤 10:00 ~ 11:00
극본 : 강은경
연출 : 지영수
제작 : 김종학 프로덕션
출연 : 안재욱, 채림, 류진, 박선영, 여운계, 장용, 추자현, 문천식, 이정길, 김해숙, 김승욱

브라운관은 한동안 시청자를 외면해 있었다. 현실에는 있음직하지도 않은 신데렐라 이야기를 담고 있던가 아니면 과거의 이야기만 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던 중 쓸쓸한 가을바람 덕분인지 브라운관은 우리의 삶을 다시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시작에는 '오!필승 봉순영'이 있었다.

이 드라마는 철저히 비현실적이다. 주인공 필승(안재욱 분)이 갖고 있는 출생의 비밀, 대기업 실장인 제웅(류진 분)과 필승, 순영(채림 분)의 삼각관계 등 비현실적이면서 드라마에 단골로 등장하는 코드가 고스란히 동원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을 최근 일련의 작품 중 브라운관이 현실을 향하는 첫걸음이라고 평한 것은 막연히 부자들의 삶을 동경하는 인물로 등장인물들을 그리지 않고 현실에 안분지족하며 하루하루를 살아내야 하는 우리의 이야기를 그 중심에 놓고 있기 때문이다. 출생의 비밀을 안고 회사의 사장 자리에까지 오른 필승은 '모든 것을 가질 수는 있지만 너무 좁은' 그 자리를 결국 박차버린다. 그리고 항상 멋진 남자와의 사랑을 갈구하던 순영은 제웅이 그녀가 찾던 이상형임에도 불구하고 사랑일기를 쓰고 조개 껍질에 사랑고백을 하는 등 너무나 서민적인 사랑을 펼쳐가는 필승을 택한다. 순영의 엄마(김해숙 분)는 회사의 전무인 민기백(김승욱 분)의 애정공세에는 꿈쩍도 하지 않고 분식점을 같이 하고 있는 자신의 남편(이정길 분)을 여전히 사랑할 뿐이다. 또 회사의 경영권을 탐내는 민전무 일당은 그저 '화팅'만 외치는 유치한 인물들로 희화화한다. 이처럼 드라마는 조금도 가진 자의 삶에 부러운 눈길을 던지지 않고 시청자들에게 '당신들의 삶이 최고'라고 속삭인다. 이렇게 한 시간이나마 우리의 삶이 최고인 것 같은 환각을 일으키는 마약은 결국 시청률 30%를 넘는 기염을 토하고 말았다. 그만큼 너무나 힘든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이 마약은 달콤했다.

하지만 마약이라 해서 우리가 이 드라마에 비난만 퍼부을 수 있는가. 드라마란 본디부터 마약의 성격을 지닌다. 마약이 고통을 잠시나마 잊게 하는 진통제 역할도 하듯 드라마는 잠시나마 현실을 잊게 하는 삶의 진통제다. 단지 대책없이 무한한 환상만을 가져다 줘 효과가 끝나면 더 큰 진통을 맛보게 하는 신데렐라의 판타지보다는 '당신들의 삶에 만족할 줄 알라'며 조용히 상처를 어루만지는 진통제가 낫지 않을까? 그리고 그 진통제 덕에 우리가 살아갈 힘을 조금이나마 얻었다면 '오!필승 봉순영'은 자기 임무를 훌륭히 완수한 것이다.

안재욱은 '더 이상 멋있기만 한 배역은 맡지 않겠다'고 했다. 그리고 '하늘정원'의 실패, 드라마 '천생연분'과 이번 작품의 성공을 통해 그는 자신의 바람대로 멋지기만 한 배우에서 고유의 색깔을 찾은 배우로 완전히 거듭난 듯 하다. 잘생겼지만 서글서글한 그의 인상은 원래 그의 성격처럼 철저히 보통사람의 애환을 담기에 더 적당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10년이 지나서야 '별은 내 가슴에'의 환상을 집어던진 안재욱. 나에게는 또 하나의 기대주로 탄생했다.

내가 특히 재미있게 본 것은 크레딧이 올라가면서 1~2분간 흑백화면으로 전개되는 이야기다. 보통 드라마 하이라이트나 다음회 예고편, 혹은 NG장면으로 일관하던 그 자투리 시간을 마치 영화의 디렉터스컷(Director's cut)처럼 숨겨진 이야기를 보여주는데 사용함으로써 끝까지 채널을 돌리지 않고 흥미진진하게 지켜볼 수 있었다. 이런 조그만 발상의 전환이 드라마 전체의 분위기까지 영향을 주는 것을 보며 이 참신한 아이디어에 감탄을 했다.

한동안 배꼽잡으며 달콤한 마약에 취해 살았던 난 또 다른 마약을 찾아 기웃거린다. '또 어떤 달콤함이 나를 기다릴까?' 하는 호기심 가득찬 얼굴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