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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진 어항의 물고기[검은꽃]

2005.06.15 23:15

TOTO 조회 수: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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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4 동인문학상 수상작
김영하 지음, 문학동네

짧은 호흡, 하지만 이야기의 구성은 치밀하게 인물의 묘사 역시 섬세하다. 긴박하게 전개되면서도 빈틈없이 구성된 이야기. 이 때문에 책을 집어 든 독자라면 소설 속 현실로 깊이 침잠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것이 <검은 꽃>의 매력이다.

TV에서 멕시코 이주 100주년이라며 보내 준 다큐멘터리를 얼핏 보기는 했다. 그나마 우리의 것과 비슷한 중국 의상과 중국식 가옥을 전통과 비슷하다며 좋아하고, 집 대문에 태극기를 걸어놓고 살아가는 그들의 모습.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그 이상의 관심도, 호기심도 갖지 못했다. 멕시코는 낯설어 한 번의 호기심 어린 공간으로 족하고, 그 곳에서 사는 그들의 모습 역시 그렇다. 우리의 핏줄이라는 잠시의 피상적인 애상 이외에 어떠한 여운도 갖기 힘들었다. 다만 그토록 낯선 공간에서 우리의 전통을 지키려는 그들의 모습이 어딘가 안타까웠을 뿐이다. 그리고 이 책을 읽었다. 거의 잊힌 내 기억 저편의 그들 모습이 다시 생생이 되살아난다. 베푼 것 하나 없이 내쫓기만 한 조국을 한없이 그리워하고 또 자랑스러워하며 살아가는 그들.

<검은 꽃>은 사람들에게 ‘애니깽’이라 피상적으로 인식된 이들의 삶을 담담히 그린다. 조선 말, 가진 것 하나 없는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대륙회사에 속아 멕시코를 향한다. 회사는 그들에게 장밋빛 미래를 한껏 안겨 주었지만 실은 농장의 노예로 팔려가는 중이다. 처음 보는 낯선 환경에서 가혹하게 착취당하며 4년의 계약기간을 채우는 그들. 그 후에도 그들은 멕시코에 남아 다른 나라 혁명에 가담하거나, 또다시 최하층으로 생활하며 낯선 공간에서 이리저리 흔들리는 삶을 살게 된다.

이 책을 읽으면서 연상된 것은 어항이 깨져 이리저리 날뛰는 물고기였다. 물론 그들에게 베푼 것도 없는 조국이었지만 그나마도 힘이 없어 다른 나라 상인에 의해 국민들이 팔려나가는데도 아무 책임을 질 수 없는 조국. 이 힘없이 망해가는 나라는 마치 깨진 어항 같다. 그리고 그 깨진 어항을 벗어나 살기 위해 이리저리 발버둥치는 애니깽들은 마치 조금이라도 더 숨쉬기 위해 팔딱이는 물고기 같다. 살아남기 위해 그들은 농장주의 앞잡이가 되기도 하고, 다른 나라 혁명에 뛰어들어 서로 적군이 되어 싸우기도 하며, 하와이로 단체 이주를 꿈꾸기도 한다. 하지만 결국 어느 누구도 행복한 삶을 누리다 죽지는 못한다. 전쟁터에서, 혁명 폭도에 의해, 아편중독으로 불행한 죽음을 맞이하는 그들. 깨진 어항 밖에서 죽는 물고기들이 평안한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인 것처럼 그들 모두는 각박한 현실에 이리저리 부딪히며 죽어간다. 그리고 우리는 이들의 몸부림을 쪼그려 앉은 채 바라보고 있다.

작가는 이 처절한 몸부림들을 여러 인물의 시선으로 번갈아 바라보며 담담히 그리고 있다. 여러 인물의 삶을 맞추어가며 그 시대를 입체적으로 구현해낸다고나 할까? 이 과정에서 작가는 극도의 절제된 시선을 통해 그들의 몸부림이 갖는 처절함을 오히려 배가시키고 있다. 여러 인물의 이야기를 빠른 호흡으로 전하는 동시에 이런 절제된 시선을 보이고 있기에 그 시대가 더욱 입체적으로, 현실감 있게 그려지고 있는 것 같다.

조선 말기. 힘없는 민초들에게 닥친 현실, 그리고 그 민초들의 감정을 이만큼 처절할 정도로 생생히 그린 소설이 또 있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