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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픽의 이념과 오해

2005.06.25 21:35

Dynamics-baek 조회 수:1082

저자 : 백수암....그냥 끄적여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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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흔히 1984년 LA 올림픽대회를 스포츠 마케팅이 본격적으로 도입된 시기로 간주한다. 이와 함께 많은 사람들이 이때부터 올림픽의 상업화 문제를 대두시켰고 숭고한 올림픽 정신에 대한 회귀를 주장하게 되었다. 특히 스폰서십의 확대, 프로 선수들의 참여 및 보상, 과열된 승부욕에 따른 부정행위 등이 그 단적인 증거로 제시되고 있다.
전통주의자들은 고대 올림픽에서부터 이어져온 올림픽 정신을 기려야 한다는 것이다. 즉 숭고한 아마추어 정신을 기본으로 하여 승리보다는 참여에 의의를 두고, 국가간 우호를 다지며, 세계평화를 우선으로 하는 의미를 강조하는 것이다.
회를 거듭할수록 이와 같은 우려 섞인 주장은 더욱 거세지고 있는 반면, 올림픽의 상업와 프로페셔널리즘의 조류는 더욱 가속되고 있다.
필자는 지난번 한 광고회사의 사보에 올림픽의 피할 수 없는 상업화 물결에 대한 글을 게재하면서 그 당위성으로써 스포츠의 사회, 경제적 기능이 역사적으로 볼 때 한 국가의 생산성을 높이는 데 기여하고 이에 따라 자연스럽게 프로페셔널 운동선수가 탄생하게 되고 스포츠 시설이 갖춰지고 해당 종목이 보급됨을 언급한 바 있다. 아울러 스폰서십의 역사가 올림픽의 역사와 함께 자연발생적으로 성장해왔으며, 올림픽 규모의 성장에 따라 독립적인 재정확보가 필연적임을 들었다. 올림픽 헌장에 의하면, NOC는 항상 국제올림픽 운동 및 스포츠의 발전을 저해하는 모든 정치, 종교, 경제의 압력에 대항하면서 자율성을 보존하도록 해야 한다. 마케팅은 스포츠가 정부의 지원으로부터 재정적으로 독립하도록 하는 주요 수단이란 것이다.
특히, 냉전시대가 종식되고 국가간 힘의 우위를 선전하기 위해 정치적으로 이용되던 올림픽이 이제는 각국의 이미지 제고를 통해 위상을 높이고 실질적인 경제적 부가가치를 창출시키고자 하는 노력이 수반되게 되었다. 이에 따라 많은 국가들이 보다 수준높은 스포츠 시설을 갖추고 보다 많은 사회간접자본을 투자해가며 올림픽유치에 열을 올리게 되었으며, 수많은 기업들이 올림픽의 이미지를 활용하여 브랜드 이미지를 제고시키고 시장을 확대시키기 위해 스폰서쉽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력에 대한 대가로써 선수들은 자신들의 기량과 성과에 따라 부와 명예를 획득하게 되었다.
올림픽을 주관하는 IOC입장에서는 날로 비대해져가는 대회 규모를 감당하고 주최국의 이익을 보장하면서, 이벤트의 수준을 높이고 관심을 극대화시키기 위해 상업화와 프로페셔널리즘의 이용은 어쩌면 당연한 선택일지도 모른다.
한편 지난 월드컵이후 언젠가 TV토론의 쟁점사항까지 번지기도 했던 문제인데 한 토론자는 지나친 승부욕과 경쟁의식이 문제라고 지적하면서 순수한 경기자체만을 즐겨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는 모습을 보았다. 순수해 보이는 외모의 토론자를 보면서 필자는 과연 스포츠를 경험해보았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반대편의 한 선수출신의 토론자가 말도 안되는 이상적인 소리 좀 하지 말라고 다그친다.
이런 생각을 해보았다. 우리가 농구를 처음 접할 때 엄격한 규정을 적용하면서 즐기지는 않는다. 최소한 잘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러나 항상 어느 선까지의 규정을 적용할런지와 관련한 문제로 항상 옥신각신해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러면서 점차 실력이 향상되고 보다 세련된 경쟁을 치루면서 농구를 즐길수록 과거에는 3초룰, 라인크로스 등의 예민한 규정은 살짝 묵인하던 것이 어느새 인가 보다 엄격한 룰을 적용하며 보다 향상된 기술로 즐기고 있음을 인지할 수 있다. 초기 농구공을 림안에 넣는 즐거움에서 뛰어넘어 보다 향상되고 세련된 기술을 겨루는 진정한 스포츠를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이때의 특징은 공식대회가 아니라도 과열된 경쟁의식과 화려한 경기내용이 벌어진다는 것이다. 이를 컨트롤하는 것은 오로지 경기 규정과 심판이다. 어느 누구도 스스로를 다지면서 이정도 선의 기술만 사용해야지 내지는 절대 파울은 하지 말아야지하는 다짐은 하지 않는다.
점점 더 경제적 논리에 의해 사회가 설명되어지고 이해되는 현대 사회속에서 이러한 논쟁은 이미 진부한 이슈가 될런지도 모르겠다. 나아가 올림픽 정신이 훼손됨을 걱정하는 것 자체가 스포츠, 그리고 우리 인간 스스로의 본성을 잊은 채 결벽증적 환상을 꿈꾸는 것일런지도 모른다.
이러한 논의에 올바르게 뛰어들기 위해서는 과거 올림픽의 역사와 정신을 올바르게 되짚어 보아야 하겠고 이를 통해서 향후 올림픽 정신을 재고시킬 수 있을 듯 싶다. 필자가 올림픽 역사학자가 아니고 올림픽에 대한 많은 고증을 이룰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자료를 지니고 있지는 않은 관계로 CARLION TV 프로덕션에서 TWI와 함께 제작된 올림픽 히스토리 영상물을 참조하여 고대 올림픽의 발전과정과 현대올림픽과의 연관고리를 풀고자 하였다.

1. 고대 올림픽의 역사
고대 올림픽은 1200년간 끊이지 않고 계속되었다. 예수가 태어났을 때 이미 올림픽은 800년의 역사를 지닌 상태였으며, 예수가 죽은 뒤 400년 후에 기독교 칙령에 의해 금지되었다. 고대 올림픽은 어떠한 생명력을 지닌 것이기에 폐지된지 1400년만에 근대 시대에 부활하여 지구상에서 가장 권위있는 인류 제전으로 군림하고 있는 것일까? 어떠한 매력과 힘이 있었던 것일까?
고대 올림픽의 고정 개최지는 펠로폰네소스 외곽에 위치해 당시의 주요 도시들과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곳은 운동선수들 뿐만 아니라 재주를 겨룰 시인들과 예술가들 텐트나 막사, 돈이나 약을 사람들에게 빌려주는 행상인, 눈속임을 이용하는 마술사와 곡예사, 음식파는 상인들로 북적거렸고, 더위와 소음, 먼지 등으로 숨이 막히는 광경으로 묘사된다.
4년마다 행해지는 하나의 종교의식으로, 올림픽 제전은 단 5일간만 진행되었지만 그나마 절반은 제우스에게 참배를 하며 보냈고 시합은 그 나머지 시간에 행해졌다. 경기중에는 그리스에서 가장 더운시기임에도 불구하고 4만명의 관중이 운집했다고 한다.
경기장에 가장 먼저 입장하는 선수는 이시대 최고의 영웅인 단거리 선수였다. 올림픽의 이름은 단거리 우승자의 이름을 땄다. 시드니, 바르셀로나, 아테네 같은 도시가 아니라 우승자의 이름이 올림픽 앞에 붙었다.
기원전 776년에 열린 최초의 올림픽에서는 경기종목이 단거리 종목뿐이었으며 그러다가 60년 뒤에 경기장 2회 달리기와 24회 달리기 등 두 종목이 늘어났다. 그후 200년이 지난 후에야 또 다른 호플리토드로모스라는 갑옷을 입고하는 육상 종목이 경기에 추가되었다.
필드경기로는 원반던지기와 창던지기 그리고 배경음악을 틀고 행해지던 멀리뛰기 등이 있었다. 멀리뛰기에서는 특이하게도 아령과 같이 생긴 ‘할테레스’라고 불리는 것을 양손에 쥐고 뛰었으며 도약직전에 손을 뒤로 뻗을 때 할테레스를 던지면서 뛰었다.
레슬링은 고대 5종 경기의 네번째 종목이었다. 20년 뒤에 권투가 포함되었고 기원전 648년에 ‘판크라티온’이 추가되었다. 판크라티온은 격투경기의 일종으로 발차기와 던지기, 꺽기, 조르기, 주먹치기 등 거의 모든 기술이 허용되는 현대의 이종격투기와 같은 종목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성행했던 경기는 전차 경주였다. 그간 단거리 경주가 차지해왔던 오프닝 경기 자리를 빼았았으며, 부유한 귀족의 노예들이 주로 출전하였다. 말을 사육하고 운송할 엄청난 비용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들은 귀족뿐이었다.
올림피아는 약 900년에 걸쳐 완전한 모습을 갖추어 갔다. 신전과 체육관, 경마장과 건축작업장이 24만평방미터에 걸쳐 거대한 단지를 이루었다. 그 후 외세의 침략으로 인해 그리스 제국은 붕괴되었고 로마 기독교 제국에서 내린 이교 신전 파괴령에 따라 올림픽은 폐지되게 된 것이다. 그 메시지를 각인시키기 위해 제우스 상을 조각한 피디아스의 작업장 한가운데에 로마 제국은 재빠르게 교회를 세웠다. 100년 뒤 올림피아는 지진으로 인해 붕괴되었고 하천의 범람으로 땅속에 매몰되었다. 그후 1200년간 그 자취를 감추게 된다.
거대한 올림피아 유적지는 영국인에 의해 다시 발견되었고, 그뒤 1870년대에 독일 고고학자들이 발굴을 시작하면서 올림피아의 웅장한 모습이 완전히 윤곽을 드러내게 된다. 영국의 국립학교와 독일의 고등학교에서 그리스 남성상은 새로 시도된 교육 개혁의 모델이 되었다. 그에 따라 인재 양성에서 스포츠의 가치를 강조함으로써 국내와 식민지에서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도록 교육했다.

2. 근대 올림픽의 태동
1894년 피에르 쿠베르탱은 파리 소르본 대학의 커다란 원형 강당에서 자신의 비전을 세계에 선포하게 된다. “올림픽 정신을 위해 축배를 듭시다. 오래 전의 강렬한 태양 광선처럼 그것은 안개 속의 시간들을 건너 20세기의 문턱에 서 있는 오래 전의 강렬한 태양 광선처럼 그것은 안개 속의 시간들을 건너 20세기의 문턱에 서 있는 우리들에게 돌아와 희망의 빛을 비추고 있습니다.”
쿠베르탱이 매료돼 있던 생각은 고대 그리스 선수들이 귀족이었다는 점이다. “그들은 명예를 위해 출전한 것이지 결코 돈때문이 아니었다. 엘리트를 위한 경기다. 선수는 엘리트여야 한다. 수는 적더라도 세계 최고의 선수들로 구성돼야 한다. 관중도 엘리트여야 한다. 교양있는 사람들과 외교관과 교수를 비롯해 장관과 올림픽 위원들로 구성되어야 한다.” 그는 근대 올림픽을 이렇게 정의했다.
최초의 근대 올림픽은 1896년 아테네에서 열렸다. 모두 11개국이 참여했고, 대회를 개최하고 가장 많은 돈과 선수를 투입한 그리스가 당연히 가장 많은 메달을 획득했다. 쿠베르탱의 비전에 따라 외국 선수들은 소수의 엘리트 아마추어들 중에서 선발됐다. 미국인들은 하버드와 프린스턴 학생이었다. 뿐만 아니라 오직 남성들만의 축제였다. 쿠베르탱은 여성이 출전하면 추한 광경이 발생할 거라며 여성은 참가시키기 않았다. 이후 완전한 남녀평등은 1984년 여성 마라톤 경기가 채택되었을 때였다. 이미 쿠베르탱이 사망한지 오랜 뒤였다.
쿠베르탱 생전에 개최된 마지막 올림픽은 불명예스러운 1936년 히틀러 올림픽이었다. 병으로 참석하진 못하였지만 그의 목소리는 개회식에서 축음기 녹음 마이크를 통하여 베를린 경기장 가득히 울려 퍼졌다. 올림픽 경기에서 중요한 것은 이기는 것이 아니라 참가하는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3. 근대 올림픽의 변화
그러나 이미 역사는 새롭게 회귀하고 있었다. 올림픽 출전 선수들은 더 이상 쿠베르탱이 주창한 엘리트 아마추어가 아니라 초기 나치 당원이었다. “히틀러 올림픽이라고도 불리는 1936년 베를린 올림픽은 좋다 나쁘다 평가하기가 곤란합니다. 두가지 상반된 의의를 갖고 있거든요 히틀러의 나치주의로 얼룩진 대회였지만 한편으로 그 대회의 운영위원장인 칼 디엠은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훌륭한 일을 해냈습니다. 베를린 올림픽 자체를 화려한 볼거리가 있는 행사로 만든 것이죠. 경기장도 새로 짓고 당시 최첨단 기술들을 고대 올림픽의 이미지와 잘 결합시켜 말이에요(Prof Donald Kyle, University of Texas at Arlington).” “나치 제 3제국 치하의 독일인들은 올림픽에서 이어 오는 전통 속에 정치적으로 이용할 게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독일인들은 자신들을 아리안 혈통이라고 믿고 있었는데 고대에 대제국을 건설했던 그리스와 로마인들이 바로 아리안족이었습니다. 그래서 같은 혈통임을 알리고 과거를 보여 줄 수 있는 상징물들을 내세우며 독일의 힘을 과시하는 정치적 기회로 삼으려 했습니다(Prof Thomas Scanlon, University of California, Riverside).”
고대 올림픽 경기에는 릴레이 성화 봉송이 없었다. 성화 봉송은 고대 그리스와 제3제국을 연결시킨 나치의 새로운 역사관에서 비롯된 하나의 상징물이었다. “릴레이 성화 봉송은 고대의 올림피아가 아니라 다른 곳에서 일어났던 일을 근대 시대에 맞는 버전으로 바꿔 놓은 것으로 훨씬 깊은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죠. 또 아이러닉한 것은 이 성화 봉송은 동유럽을 거쳐서 베를린 주경기장으로 이어졌는데 나중에 히틀러 부대가 유럽을 침략하러 간길이 그 길입니다. 성화는 많은 걸 상징하죠(Prof Donald Kyle, University of Texas at Arlington).” “흔히들 오륜 마크가 고대의 올림픽 경기때 생긴줄 알고 있지만 그때와는 전혀 관계 없이 근대에 만들어졌고 독일의 지질학자들에 의해 발굴된 거예요. 처음 발견됐을땐 아주 떠들썩했습니다. 고대 올림픽의 상징물이 발견됐다고 하면서요. 하지만 사실은 독일 지질학자 자신들이 묻어 놓은 것이었죠(Prof Thomas Scanlon, University of California, Riverside).”
다행히 히틀러의 흉악무도한 사상은 지속적인 영향을 끼치지는 않았다. 그러나 한 가지 중요한 면에서 나치는 영원한 흔적을 남겼다. 화려한 볼거리를 최초로 도입했다는 점이다. 올림피아에서 성화에 불을 붙이고 세계 각국의 마을과 도시를 돌며 릴레이로 봉송한 뒤 경기장에서 감동적인 점화식을 가졌다. 그 전까지는 그런 무대가 존재하지 않았다. 이것은 순전히 나치의 산물인 것이다.
그렇지만 올림픽 관중들과 선수들 모두에게 성화 봉송은 심오한 상징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성화 봉송은 우리가 말하고 느끼는 올림픽 정신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에 놓여 있다. 쿠베르탱 남작의 제창으로 올림픽이 부활하고 히틀러와 그의 천년 제국이 사라진 이후로 올림픽 게임은 세번째 변화를 거쳐 오고 있다.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올림픽 정신은 세계 평화와 국가 간의 이해를 증진하고 정정당당히 싸움으로써 전 세계인의 우호를 도모하고 남녀 민족, 국가 간의 차별을 넘어 평등을 추구하며 약자와 최선을 다한 패자를 존중하는 것 등 여러 가지 의미를 갖고 있다.
1890년대에 엘리트층에게 그랬듯이 1930년대에 나치에게 그랬듯이 고대 올림픽 제전은 오늘날 우리가 가치를 두고 있는 올림픽 정신의 근원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 지속적인 연관성을 강조하기 위해 올림픽 개막식에서 가장 먼저 입장하는 영광은 항상 그리스에게 돌아간다.

4. 고대와 근대 올림픽의 서로 다른 이상
1) 종교의식으로 출발
그러나 근대 올림픽과 고대 그리스 올림픽 사이에 어떤 공통점이 있을까?
최근 올림픽 경기가 다시 그 발원지 그리스로 돌아갔다. 그러나 과연 근대에 들어 부활한 올림픽 경기가 2800년 전 그리스 외딴 마을에서 시작된 제전과 정말 어떠한 관련이 있는 것일까? 우선 바로 한가지 차이 나는 점이 있다. “올림픽 경기는 이교도 행사였습니다. 제우스에게 바치는 제사였죠. 이 기간 동안 소 100마리가 제우스에게 제물로 바쳐졌어요. 소 100마리를 죽여서 마지막 밤에 승자를 위한 연회를 베풀어 주었죠. 경기에서 승리하는 그 순간 인간은 신과 가장 가까워졌다. 경기에서 우승한 사람은 신성한 종교적 기운 같은 것을 얻을 수 있었고 보통의 인간보다 더 위대한 존재가 되었죠(Prof Thomas Scanlon, University of California, Riverside).” “일생에서 신과 가장 가까워질 수 있는 방법은 인간과 신사이에 존재하는 아주 조심스러운 한계를 넘어서지 않으면서 올림픽의 승자가 되는 것이었죠. 그건 종교의 틀 안에 있었고 경쟁을 통해 인간이 이뤄 낼 수 있는 최고의 육체적 성취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Dr Paul Cartledge, Cambridge University).”
그리고 종교와 선수 사이에는 직접적인 연관성이 있었다. 그리스인들은 신이 사람의 이상적 모습이라고 믿었고 그러한 믿음을 예술품에서 완벽한 전라의 인간으로 표현했다. 1000년동안 그리스 선수들은 신이 내려준 유니폼인 나체상태로 경기에 임했다.

2) 최고지상주의
고대 그리스인들의 스포츠에 대한 태도는 굉장히 많은 면에서 근대 올림픽의 정신과 아주 멀리 동떨어져 있었다. 그리스는 명예와 수치, 이 둘만 존재한 사회였어요. 그 중간 개념은 없었다. 그러니까 다시 말해서 경기에서 승자만 칭송되고 나머지는 모두 패자로 조롱 받았다.
오늘날에는 최선을 다한 패자에게 갈채를 보낸다. 탄자니아 출신의 존 스티븐 선수의 경우 1968년 마라톤에서 꼴등으로 들어왔음에도 멕시코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나 신기록 수립 선수들보다 더 오랜 시간 동안 화면에 비춰졌다. 고대 올림픽 정신에서는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기지 못하면 치욕을 당했다. 그래서 경기가 끝나자마자 나가야 했죠. 심지어 그 어머니도 수모를 당했어요. 그것은 제로섬 게임입니다. 1등만 존재하고 승자는 신에게 선택된 사람으로 여겨졌죠. 2등이나 3등은 있을 수가 없었어요. 단체경기도 없고, 여자종목도 없고 승자 아니면 패자였어요(Prof Donald Kyle, University of Texas at Arlington).” 가장 중요한 건 개인의 승리였다.
그리스인들은 올림픽을 ‘경기’라고 부르지 않았다(prof Manfred Laemmer, Olympic Hisotrian). 그들이 칭한 이름은 올림피아 아고나스였다. ‘아고나스’는 그리스어로 경기라는 뜻 외에 전투 혹은 전쟁이란 뜻을 갖고 있었다. 기권하는 것은 엄청나게 수치러운 것으로 포기하느니 죽는 것이 나았다.
“올림픽을 보는 사람들은 스포츠를 정말 잘 알거나 선수들의 훈련과 준비에 관여 햇던 사람들이거나 최고 선수의 경기를 보고 싶어하는 사람들이었죠(Dr. Nigel Spivey, Cambridge University).”. 관중들은 선수들을 존경하였고, 경기장에 모인 관중은 경기중인 선수들에게 완전히 몰입되었다. 오늘날 우리가 스포츠를 볼 때 흥분하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고대 올림픽에서의 승리는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성취를 의미했고, 상상도 못할 정도의 부와 명예 그리고 지위를 안겨 주었다. 우승자는 종종 신에 가까운 숭배를 받았고 어떤 경우에는 살인자도 용서 받았다. 그 혜택이 실로 엄청나 종종 부정행위의 유혹에 넘어가기도 했다.
이러한 면에서 본다면 현대의 올림픽 출전 선수들의 피나는 노력과 치열한 경쟁은 고대 올림픽이 추구했던 정신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고대 올림픽 경기에서 우승자가 되기 위해서는 아주 집중적으로 훈련해야 하고 한두 종목만을 전문으로 하여 지금의 트레이너와 같은 사람에게 도움을 받아야 했다. 또 치열한 경쟁 때문에 고대 그리스인들은 대회 몇 개월 전부터 혹독한 연습에 들어갔다. 어떻게 해서든 승자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 였다(Prof Donald Kyle, University of Texas at Arlington).”. “그리스인들은 처음에 기초 체력을 쌓고 그런 다음 전문 기술을 익히고 그 다음엔 기술을 다듬었다. 오늘날과 똑같았다(Prof Peter Radford, Professor of Sports Scences)”. 고대 그리스의 스포츠는 아주 엄격한 편이었다. 아주 이른 기원전 6세기에 엄정한 식사 규정과 훈련 프로그램들이 트레이너들에 의해 마련돼 있었다.
육상 5000미터 부문 세계기록 보유자였던 크리스토퍼 채터웨이 경은 아마추러리즘 쇠퇴기였던 당시를 이렇게 회상한다. “우리가 감탄해 마지않던 선수는 그다지 힘들게 노력하지 않고도 좋은 결과를 얻는 사람이었어요. 당시에 떠돌았던 영웅담도 많아요. 남아프리카 공화국 출신의 베빌 러드라는 육상선수는 1930년대에 이런 소문의 주인공이었죠. 피우고 있던 시가를 경기장 트랙 한쪽 구석에 놓고 경기에 출전해 400미터 육상 신기록을 세우고 난 후 아까 그 시가를 들어 마저 피웠다는 얘기요. 제가 선수시절에는 그러한 일로 칭송되었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변했다. 아니 과거로 회귀하고 있는 것이다.

3) 평등한 참여에서 출발
고대 올림픽에 출전한 선수는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쿠베르탱과 수세대의 역사가들이 주장한 것 처럼 엘리트들이었을까? 고대 그리스가 운동선수의 역사에 기여한 가장 큰 공로는 바로 스포츠의 민주화라 할 수 있다(Dr. Michael Poliakoff, Author, Combat Sport in the Ancient World). “그들은 스포츠를 모든 시민에게 개방시켰죠. 그것은 빅토리아인들이 믿었던 혹은 믿고 싶어했던 고대 그리스 인들과 상반된 것이었죠.”. 초창기 올림픽의 우승자 중에는 요리사, 목동, 어부도 있었고, 농부도 있었다. 과연 쿠베르탱의 상상처럼 외교관과 교수, 장관들이었을까? 어떤 환경에서 경기를 관전했을까? “더운데다 파리가 들끓고 사람도 많았죠. 관전 시설들이 한 마디로 아주 형편 없었어요. 왜냐하면 고대 올림픽에선 우선순위가 있었거든요. 첫번째가 신이고, 두번째가 운동선수, 세번째가 관중이었죠(Prof Donald Kyle, University of Texas at Arlington).”. 심지어는 말 안듣는 노예한테 때린다는 말보다 무서운 건 올림피아로 보낸다는 농담까지 있었을 정도였다.
한편 그리스의 운동선수들과 성적 매력은 불가분의 관계였다. 올림픽 경기에서 우승한 사람은 사람들에게 흠모의 대상이 되었다. 승자는 높은 위상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영웅 대접을 받았다. 누가 영웅과의 하룻밤을 싫어하겠는가?
그리스인들의 노출은 단순한 성적 과시였을 뿐 아니라 신의 완벽함을 상징하는 것이었고, 출신과 신분의 차이를 모두 없애기 위한 것이었다. 경기장 안에서는 귀족과 평민 모두 알몸으로 겨뤄야 했다. 트랙 위에서도 링 안에서도 그리스 선수들은 세상 앞에서 완전히 발가벗겨져 있던 것이다. 그리스인들이 추구한 것은 쿠베르탱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높은 차원의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쿠베르탱은 참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지만, 그리스인들이 올림픽에서 추구한 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갖고 있는 기대를 뛰어넘고 우리 인간이 갖고 있는 그 모든 한계를 초월해서 후세에도 길이 남을 지속적인 영광을 얻는 것이 었다. 그래서 2,500년이 지난 지금도 기억될 수 있는 것이다. 올림픽이 1200년 동안 지속된 것은 우리에겐 놀라운 일이다. 그것은 신성함과 관계가 있다. 올림픽은 성스러운 행사였고, 가장 오래 되고 가장 권위있는 경기였다. 근대 올림픽은 100년 밖에 안 됐는데도 어려움이 많았다. 그래서 우리는 고대 그리스가 추구한 올림픽 정신을 보고 이러한 결론을 얻을 수 있다. 평등한 관계 속에서만 사람들 모두가 평화롭게 모일 수 있고, 서로의 가치를 인정할 수 있는 것이다. 같은 민족끼리지만 그리스인들은 경기를 할 때 최선을 다했고, 그러면서도 인간으로서 서로를 존중해 주었다. 이게 고대 경기의 가장 위대한 면이고 근대에도 이어질 수 있는 것이다. 근대 올림픽이 고대 경기처럼 1200년 넘게 지속될지는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알수가 없지만 진정으로 지속되길 바란다. 근대 올림픽은 고대 올림픽과 탄생된 사회도 다르고 지키는 윤리규범도 다르며 섬기는 신도 다르다. 또 역사적으로 3000년이란 시간의 공백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여기엔 강한 연관성이 있다.

4) 프로페셔널리즘과 계급주의
고대 올림픽은 그리스의 모든 자유인에게 개방돼 있었다. 실력있는 젊은이는 올림픽 출전을 직업으로 삼을 수도 있었고 상위권으로 올라가면 엄청난 수입을 벌었다.
이와는 아주 대조적으로 근대 올림픽은 별난 규정 때문에 처음부터 불완전햇다. 아마추어 엘리트 남성과 소수의 엘리트 여성에게만 올림픽 참가 자격이 주어지고 선수들에게는 어떤 상금도 주지 않으며 참가하는 것 자체가 영광이라는 내용이었다.
“고대의 운동선수들은 운동을 잘하고 노력하는 사람을 뜻했죠. 그러니 고대 올림픽 선수들이 단지 귀족들의 놀이일 뿐이고 다른 어떤 의미도 없었다는 건 우리가 그렇다고 믿고 싶어하는 신화일 뿐이죠(Prof Donald Kyle, University of Texas at Arlington).”. “올림픽에서 이기는 건 최고가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마추어 중에서가 아니라 그리스 전체에서 말이죠. 다시 말해서 당시에는 시대착오적 생각인 프로와 아마추어의 구분이 없었기 때문에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있어 올림픽은 훌륭한 선수들이 최고를 판가름하기 위해 자신을 시험하는 곳이었다는 것을요(Prof Hugh Lee, University of Maryland).”
참가 자격을 아마추어에게만 제한한 건 고대 올림픽에서 비롯된 게 아니다. 아마추어리즘은 빅토리아 시대의 산물이다. 영국의 상류층이 주창했고, 그들을 찬양한 미국인들이 그걸 따라 했다. “그들은 아주 구체적이고 꼼꼼하게 금지 이유를 정했습니다. 자기들보다 유리하다고 생각되면 전부 다 제외시켜 버렸죠. 만약 조정 경기에 뱃사공이 나가면 평생 노젓는 걸로 먹고 산 그들이 자기들보다 노를 잘 저을 테니까 금지시켰죠. 또 육상경기에 노동자가 나가면 육체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해와서 팔다리가 더 튼튼할 테니 자기들보다 유리하니까 금지시켰어요. 그렇게 해서 계급에 따른 새로운 스포츠가 생겨났습니다. 아마추어리즘 규정이라는 새 이름으로 포장돼서 말이죠. 상금이 없었기 때문에 형편이 안 되는 사람은 올림픽에 참가할 수 없었습니다(Prof Peter Radford, Professor of Sports Scences).” 이것이 근대 올림픽이 탄생하게 된 배경이었다.
운동선수들이 고대 그리스인들처럼 자금 지원을 받기까지는 굉장히 길고 힘겨운 투쟁이 있었다. 선수들이 자금 지원을 받는 것을 전면 금지한 규율은 1981년이 되어서야 해제됐다. 그동안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다. 파보 누르미는 명실상부한 20세기 초 최고의 장거리 육상선수였다. 군더 해그와 아르네 안데르손은 번갈아 중거리 신기록을 일곱차례 깼고 그 기록은 10년간 유지되었다. 그러나 모두 사소한 돈을 받은 이유로 명예를 박탈당했다. 그러나 가장 최악의 경우는 짐 소프였다. 미 원주민인 그는 1912년 스톡홀롬 올림픽의 5종 경기에서 금메달을 차지했고 스웨덴 왕에게 현존하는 세게 최고의 선수로 칭송받았다. 그러나 그는 메달을 반환하고 여러 수모를 겪어야 했다. 한때 프로야구를 하면서 몇 푼의 돈을 번 사실이 나중에 밝혀졌기 때문이다.
“짐 소프를 올림픽에 출전하게 해 준건 선수로서의 뛰어난 실력과 아주 헌신적이고 열성적인 노력이었습니다. 그는 깨끗하게 경기했고 정당하게 이겼어요. 그러나 결국 메달을 빼았겼고 모든 명예를 박탈당했으며 인생은 내리막길로 향했습니다. 술에 빠지고 직업 없이 전전하다가 외로이 죽어 갔죠. 그러나 그렇게 된 것은 올림픽 아마추러리즘에 대한 엘리트들이 가진 환상 바로 그것 때문이었습니다. 그 속에는 20세기 엘리트 집단이 갖고 있던 진짜 사악한 저의가 들어있습니다. 상인들을 비롯하여 자기들보다 지위가 낮은 사람들이 올림픽에 출전하여 섞이는 것을 원치 않았던 거죠(Dr. Michael Poliakoff, Author Combat Sport in the Ancient World).”
고대 그리스인들은 무슨말인지 모를 것이다. 돈과 스포츠가 섞이는 걸 거부한 결벽증자는 그 시대에는 없었다. 사실 고대 올림픽의 우승 상품은 순전히 상징적인 야생 올리브관이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고대 올림픽이 아마추어리즘을 표방했다고 말하는 이들은 우승자에게 돌아가는 엄청난 금전적 보상을 간과한 것이다. 우승자에게 상금을 수여하는 대회 시스템은 고대 그리스 스포츠의 커다란 특징이었다. 이런 시스템 때문에 그리스인들은 어릴 때부터 소년 대회에서 프로 경력을 쌓았다. 그 다음 상금으로 코치를 영입하여 실력을 점점 향상시켜 나갔다. 지역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받은 유망한 젊은 선수들은 아테네 대회와 같은 큰 대회로 진출했다. 거기서 단거리 선수가 몇 초 동안 버는 돈은 숙련공이 1년간 버는 것보다 많았다. 최고에 오르면 받게 되는 올리브관은 상징물이긴 해도 엄청난 가치를 갖고 있었다. 각종 대회의 조직위원들은 후한 액수를 제시하며 우승자를 데려오는 데 열을 올렸다.
논리의 세계에서 아마추어리즘이 시대착오적이라고 생각된 때는 구소련 연방의 선수들이 처음으로 올림픽에 참석하면서부터이다. 소위 ‘불의 전차’시대의 엘리트들 앞에 국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면서 강도 높은 훈련을 받은 전문가들이 등장했다. 결과는 뻔한 것이었다. 첫 출전 대회인 1952년 헬싱키 올림픽에서 구소련 선수들이 71개의 메달을 가져갔다. 그 후로 그들은 세계 최강이었다. 멜버른에서 메달 98개를 휩쓸었고 4년 뒤 로마에서 103개의 메달을 획득했다. 그들은 굉장히 어렸을 때부터 만들어지고 다듬어진 새로운 타입의 선수들임에 틀림없었다. 올림픽을 자국의 명분과 국위 선양을 위해 이용한 것은 그게 처음이 아니었다. 그러나 올림픽 우승이라는 목표를 향해서 그렇게 혹독하고 치열한 훈련을 행한 적은 없었다.

5) 정치적 이용
냉전시대가 시작된 후로 올림픽은 이념 갈등에 의해 퇴색되기 시작했다. 그 갈등이 최고조에 이른 것은 1980년과 1984년 올림픽의 보복 불참에서였다. 그러나 이미 그때 정치는 근대 올림픽에 훨씬 심각한 오점을 남긴 뒤였다. 1972년 뮌헨 올림픽에서 팔레스타인 무장괴한들이 어둠을 틈타 올림픽촌에 침입했다. 그리고 그후 24시간 동안 17명이 사망했다. 이스라엘인 11명 팔레스타인인 5명 독일 경찰 1명이었다. 그 사건은 근대 사회가 얼마나 큰 병을 앓고 있는지 말해 주었다. 세계평화와 이해증진을 위한 올림픽에서 그토록 끔찍한 유혈사태가 발생했다는 것은 아주 섬뜩한 일이었다.
고대의 올림픽과 비교하면 너무나도 부끄러운 사건이었다. 역사학자들에 따르면 그때에는 일단 올림픽 경기가 시작되면 그리스의 모든 도시국가에 완전한 평화가 선포됐다고 한다.
그러나 고대 올림픽에서조차도 정치적 이용 흔적은 발견된다. “선수든 관중으로서든 올림피아의 사방 어디를 보나 여기저기 승리의 징표들이 있을 겁니다. 도시국가들은 지금의 보관실과 같은 작은 예배당을 지어서 자신들의 전리품들을 전시하곤 했습니다. 전리품 중엔 그리스인이 야만족으로 여긴 외국 병사의 것도 있었지만 대부분 자기들끼리의 전투에서 얻은 물품이었죠. 경기장 안에도 곳곳에 전리품들이 있었습니다. 관중들 사이사이에 말이죠. 관중들 간에 친밀감을 높이자고 그것들을 갖다 놓은 건 절대 아니었을 겁니다. 전리품의 궁극적인 목적은 사람들을 자극해서 긴장감을 높이기 위한 거였죠. 그런 긴장감은 바람직한 방향으로 해결됐습니다. 경기에 집중하면서 긴장감을 날려버린 거죠(Dr Nigel Spivey, Cambridge University).”

6) 인간의 속성 부정행위
두 문명이 가진 상대적 장점들에 대해 논의할 필요없이 알 수 있는 건 인간의 특성은 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올림픽에 참가한 모든 선수들을 대신하여 맹세하기를 이번 올림픽에 참가하는 세계 각국에서 온 우리 선수단 전원은 출전하는 종목에서 올림픽의 모든 규정을 존중하고 지킬 것을 약속합니다.” 고대와 근대 올림픽의 연관성을 보여주는 의식은 대회 시작 전에 실시되는 올림픽 선언문 낭독이다. 암묵적으로 그것은 부정행위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겠다는 맹세다. 고대 그리스 선수들은 이 선서식을 엄숙한 종교 의식의 하나로 받아들였다. 그건 훈련을 성실히 했다는 맹세였고, 모든 규칙을 지키고 부정행위를 하지 않겠다는 신과의 절대적 약속이었다. 오늘날처럼 그건 부정행위 가능성이 많았다는 뜻이고 한편으로 이 문제를 엄중히 처벌하겠다는 당국의 의지를 보여 주는 것이었다.
우리 시대에는 부정행위가 근대 올림픽 탄생 초기부터 그 특징으로 자리잡았다. 1904년 세인트루이스 올림픽 마라톤 경기에서 1등으로 들어온 미국의 프레드 로즈가 18Km정도 차를 탄 사실이 나중에 밝혀지게 되면서 금메달은 미국의 토마스 힉스에게 돌아갔다. 더 최근에 일어난 금메달 사기 사건들은 그 수법이 지능적이다. 소련의 펜싱선수 보리스 오니스첸코는 1972년 대회에서 은메달에 머무르자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서는 금메달을 따겠다는 일념하에 경기가 시작되기 전 자신의 검에 철사를 감아 상대선수 몸에 닿지 않아도 닿은 것 처럼 기록되게 하였다. 그러나 1988년 벤존슨 파문이 머릿기사를 장식한 이후로 가장 이슈가 되어온 것은 선수들의 근육강화제 사용문제였다.
그렇다면 고대에는 어떻했을까? “제우스의 총애를 받으려면 몸을 최상으로 만들어야 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선 모든 수단을 동원해야만 했고, 누가 좋다고 하는 건 뭐든 먹어야 했죠. 어떤 약물이 팔다리를 더 강하게 해 준다고 하면 그래서 이길 수 있게 해준다고 하면 주저않고 먹었습니다. 금기 약물 먹는 걸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았죠. (Prof Peter Radford, Professor of Sports Sciences)”. 고대 올림픽에서 그 외의 모든 부정행위를 스포츠 정신의 위반일 뿐 아니라 신성모독으로 여겼다. 성스러운 올림픽의 수호자이자 최고신의 분노를 사게 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때로는 승리에 대한 갈망이 신의 분노에 대한 두려움보다 강했다.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훈련을 하고 몸을 단련하고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바쳤다고 해보죠. 그 정도로 실력을 쌓고 나면 이제 자신감도 생기고 승리를 확신할 것 같지만 패배에 대한 불안에 빠지죠. 따라서 놀랄 일도 아닙니다. 잔인한 공격이나 반칙이나 뇌물 같은 게 고대 올림픽에 있었다는 사실 말이죠. 그게 인간의 특성이니까요. 꼭 승리하겠다는 갈망은 경기 시작부터 있었을 겁니다(Prof Donald Kyle, University of Texas at Arlington).”
근대 올림픽이 지닌 짧은 역사 동안 부정과 비리는 올림픽 조직의 고위 관리들에게도 뻗쳐 갔다. 1998년 11월 24일 고위 간부의 부패 사건이 세상에 밝혀졌다. 그것은 올림픽 사상 최악의 비리 파문 중 하나로 기록됐다. 그리고 또다시 2002년 동계올림픽 유치 과정에서 솔트레이크시티 올림픽 조직위원회가 IOC 국제 올림픽 위원회의 일부 위원들에게 표를 얻어내기 위해 금품과 무료 의료서비스 혜택을 주고 가족에겐 미국 대학 장학금을 제공한 것이 드러났다. 그 사건으로 인해 IOC위원 4명이 물러나야 했다.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 기간 중에 부패의 병균은 올림픽 심판에게도 퍼져갔다. 캐나다의 남녀 스케이팅 팀 제이미와 데이빗의 눈에 띄는 실수에도 불구하고 금메달은 러시아 팀에게로 돌아갔다.
올림픽 개최지를 한 장소에만 고정시킴으로써 고대 그리스는 유치파문을 피했다. 또 승자를 판가름하는데 주관적 요소가 들어갈 수 없는 경기들만 개최함으로써 심판 비리도 없앴다. 결승전에 먼저들어오고 상대에게 KO펀치를 날리고 원반을 가장 멀리 던져야만 그 승리가 인정됐다. 이런 안전조치들에도 불구하고 고대 올림픽에서 공식적으로 행해진 정말 엄청난 부정 사건이 있었다.
그 전후로 일어난 모든 올림픽 비리 파문을 무색하게 만들 사건이었다. 고대 올림픽을 얘기할 때 빠지지 않고 거론되는 사람은 악명 높기로 유명한 폭군 네로입니다. 대회란 대회는 다 참가하여 수백 번을 우승했다. 진적이 없었다. 네로는 올림픽에 말 10마리가 끄는 전차를 갖고 갔었다. 10마리 말로 끄는 전차경주는 없었다. 명예를 자기가 얻으려고 운전은 직접했다. 네로 황제는 고대 그리스의 모든 전차경주 경기를 서기 67년 한해에 몰아서 개최하도록 명령하였다. 자신이 전부 참가하기 위해서 였다. 그 일정에 맞추기 위해 올림픽은 2년 동안 지연됐다. 출발하고 나서 첫번째로 돌 때 네로는 균형을 잃고 전차에서 떨어지게 된다. 그는 결국 경기를 끝내지 못하고 포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로에게 월계관이 수여됐다. 경기를 맡은 심판들이 25만 드라크라의 뇌물을 받은 것이었다. 오늘날 가치로 수천만 파운드에 달하는 돈이다. 그들은 또 로마 시민권도 약속받았다. 그리고 2년뒤 네로가 죽은 후에 그의 이름은 우승자 명단에서 삭제됐고 심판들은 뇌물로 받은 돈을 반환해야 했다.

4. 과거로의 회귀
근대 올림픽은 고대 올림픽과 탄생배경도 다르며 지키는 윤리규범도 다르며 섬기는 신도 다르다. 또 역사적으로 3,000년이란 시간의 공백이 있다.
이러한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이 둘은 인간에 의해 강하게 연결돼 있다. 나중에 알려진 것이지만 무엇보다 가장 놀라운 사실은 근대 올림픽은 발전할수록 고대 올림픽의 모습에 가까워져왔다는 것이다.
IOC 국제올림픽 위원회가 아마추어리즘에 대한 규율을 완화한 후 올림픽은 최고 중의 최고들의 잔치가 됐다. 올림픽에서 영웅이 된 선수는 프로 스포츠 최고 스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었다. TV방송과 잡지 기사와 수억대의 광고에 나오면서 올림픽 스타는 이제 모든 가정에서 친숙한 얼굴이 됐다. 전통주의자들은 스포츠 스타 시스템이 등장한 것에 대해 올림픽을 상업주의와 이기주의로 오염시키는 일이고 올림픽 정신에 위배된다고 한탄한다. 그러나 이것은 역사와 심리학을 모르고 하는 얘기다.
우리만큼이나 그리스인들도 스포츠 영웅을 절실히 원했다. 승리한 선수는 고향에서 열렬한 환영을 받았는데 오늘날 월드컵 우승팀이 돌아올 때보다도 더 열광적이었다. “엔자이나토스라는 남자는 제 생각에는 고대 올림픽의 하이라이트 경주라고도 할 수 있었던 200m 단거리에서 두번이나 우승을 했습니다. 그러자 이 선수를 고향으로 호위해 주기 위해 무려 300대나 되는 전차들이 행렬을 지어서 따라갔다고 전해집니다. 하지만 그 전차들이 통과하기에는 성벽입구가 좁았는데 그냥 성벽을 허물어뜨리고 들어갔습니다(Prof Paul Cartledge, Cambridge University).”, “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이젠 그리스에서 큰 우상이 되어 버린 위대한 스포츠 선수가 마을로 돌아왔기 때문에 성벽을 수리하지 않았어요. 그가 일종의 부적이었으니까요. 그는 힘과 권력의 상징이었고 제우스의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가 마을에 있는 한 안전하다고 생각했죠(Prof Peter Radford, professor of Sports Sciences).”
오늘날 스포츠 신화를 이룩한 선수들은 그 명성이 지속돼 온 기간이 10년에서 20년이고 길어야 100년 정도다. 그러나 고대 그리스인들은 시와 조각상과 꽃병의 장식화를 통해서 영웅 선수들의 명성이 영원히 지속되도록 했다. 고대의 선수들은 관중들에게서 엄청난 존경을 받았고 경기에서 이기면 말 그대로 거의 신격화됐습니다.
그리스 영웅들은 사랑스런 이미지가 아니었다. 오늘날 우리는 영웅의 의미를 생각할 때 도덕적 영웅의 의미도 포함하는 경향이 있다. 기꺼이 자신의 몸을 던져 좋은 일을 한 사람이요. 그리스에선 그렇지 않았다. 심지어는 살인자라 할지라도, 뛰어난 영웅으로 살았을 때 위대한 일을 한 사람으로서. 그는 너무나 뛰어난 재능으로 살았기에 살인을 했음에도 그런 숭배와존경을 받는게 당연하게 생각됐다(Prof Hugh Lee, University of Maryland).
지금은 스포츠 스타가 숭배되는 정도까진 아니다. 살인자도 용서되지 않는다. 아직까지는 말이다. 그러나 비교적 짧은 근대 올림픽 기간동안 우린 쿠베르탱의 귀족적 아마추어리즘에서 점점 멀어지고 고대 그리스 올림픽에 더 가까워져 왔다. 살아 있는 어떤 선수에게나 기본적인 질문을 해보라. 왜 올림픽에 나가냐고. 그럼 주저없이 그리스인들이 했을 대답과 말할 것이다. 알 오에터 원반던지기에서 4연속 금메달을 땄던 선수다. “제가 올림픽에 출전하여 싸운 이유는 단 하나였습니다. 바로 저를 위해서 였죠. 저 자신을 위해서요.” 매트 핀센트 올림픽 조정경기 3연패자다. 아주 촉박하고 짧은 시간에 자신을 엄청 혹사시켜야 하는데 누구를 위한 것인가. 바로 자신이다. “중요한건 나 자신을 위해서라는 이기적 마음으로 전념하는 겁니다.” 스테파니 쿡 시드니 올림픽 여자 펜싱 금메달리스트다. “저는 제가 될 수 있는 한 정말 최고가 되고 싶었어요. 제 잠재력을 모두 발휘하고 싶었고 훈련해 왔던 걸 모두 활용하고 싶었고 제 한계에 도전하고 싶었습니다.” 덩야핑 세계 탁구 챔피언십에서 18차례 우승했고 올림픽에서 4개의 금메달을 땄다. “저는 재능이 있었고 제가 탁구를 잘 한다는 걸 보여 주고 싶었어요. 세계 최고의 탁구선수가 될 수 있다는 걸 증명하고 싶었죠.” 마이클 존슨 올림픽 금메달 5관왕이고 200m와 400m달리기에서 세계 신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저는 올림픽에 나가서 제가 세계 최고라는 걸 증명하고 싶었습니다. 올림픽 출전은 참가에 의의를 두지 않아요. 그건 이기기 위해서 입니다.”
근대 올림픽은 비틀거리며 전진해서 결국 고대 올림픽이 있던 자리로 돌아왔습니다. 그것은 올림픽이 다시 혹독한 훈련을 요하고 최고의 선수들이 펼치는 치열한 경쟁과 완전한 대결의 장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거짓 역사를 만들지 않더라도 두 올림픽의 연관성은 쉽게 발견된다. 상업주의와 프로페셔널리즘과 쇼맨쉽 이것이 진정한 공통점이다. 근대 올림픽은 발전을 거듭할수록 고대 올림픽의 실상과 점점 비슷해졌다. 명예를 무엇보다 소중히 했던 고대 그리스인들은 승리의 순간을 수백만 가정에 전송해 주는 방송 시스템에 기뻐했을 것이다. 300대가 넘는 전차 행렬로 우승자를 예우해 주었던 그들은 근대 올림픽의 화려한 광경에 환호했을 것이고, 발가벗고 싸웠던 선수들은 지금의 추세를 열렬히 성원했을 것이다. 신체의 아름다움을 찬미하는 경향이 점점 커지는 지금의 추세를 말이다. 근대 올림픽은 원 한 바퀴를 다 돌아서 고대 올림픽과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다. 올림픽 경기는 점점 더 과열되면서 돈벌이가 될 수 있는 장을 만들어 주기 때문에 필연적 결과로 상업주의가 자리를 잡게 되었다. 또 정치적으로 이용될 수 있는 위험이 내재되어 있다. 그리고 경기들이 아주 화려해지고 있다. 아마추어 젊은이들이 장난치듯 하는 경기가 아니라 항상 최고의 수준에 대한 상식을 깨면서 아주 진지해진게 사실이다. 그게 올림픽의 참 매력일 것이다.
세계에서 사람들이 오는 것도 그 치열함을 보기 위해서고 정치적 문제와 쇼맨십 치열한 경쟁 외에도 이 둘은 또 다른 공통점을 갖고 있다. 바로 정신적인 문제다. 우승자의 얼굴에는 빛이 가득 퍼진다. 모든 예상과 기대를 깨고 이긴 인간 승리자의 얼굴에서 나오는 그 빛은 지금까지 한 번도 꺼진 적이 없다. 고대부터 오늘날까지 그 빛은 언제나 있다. 바로 그 감격적인 순간에 우린 굉장한 사실을 상기하게 된다. 우리가 가진 인간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을. 자신이 가진 한계를 끊임없이 시험해 보는 것 인간이 할 수 있는 영역의 범위를 계속 넓혀 가는 것 인간이 정신적, 육체적으로 할 수 있는 것 그 이상을 하는 것 그것은 희망일 것이다.

* 이현국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5-06-26 0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