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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반의 名作[패션 70's]

2005.09.03 21:18

TOTO 조회 수:1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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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송 : SBS 월, 화 밤 9:55~11:00
연출 : 이재규
극본 : 정성희
제작 : 김종학 프로덕션
출연 : 이요원(고준희/한더미), 김민정(한강희/고준희), 주진모(김동영), 천정명(장빈), 이혜영, 전인택, 최일화, 김병춘, 현영

경악했다. 우리 민족의 상처인 6.25 전쟁을 질펀하게 담아내면서도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어머니와 아들의 관계, 남녀의 사랑과 증오 등 이 공간에 존재하는 우리들의 다양한 모습을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엮어가는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작품은 이러한 소재에만 의의를 두는데 그치지 않았다. 완급을 적절히 조절하며 진행하는 구성, 곳곳에 스며있는 극적인 긴장, 마치 영화 같은 HD화면에 당시 시대를 충실히 재현한 세트, 기존보다 한층 업그레이드 된 연기력을 갖춘 연기자들까지. “본격적인 이야기가 전개되기도 전인데 이 정도라면 어쩌란 말인가”라며 난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런데 갑자기 강희(김민정 분)가 죽었다. 그것도 정말 '파란만장하게'. 준희(이요원 분)와의 본격적인 경쟁을 고대하던 난 황당할 수밖에. 기획의도대로라면 강희와 준희의 패션 분야에서의 경쟁을 담아내며 동시에 70년대의 패션 이야기가 화려하게 진행되어야 하는데 말이다. 강희가 죽자마자 드라마는 급격히 마무리됐다. ‘패션’이란 제목을 단 드라마가 ‘패션’을 본격적으로 이야기하지도 못하고 끝나버렸다. 볼 때마다 흥분 속에서 침을 삼키기만 했던 난 어이가 없었다.

내가 기대했던 대로 운명으로 얽힌 두 주인공이 풀어나갈 70년대의 패션 이야기가 전개됐다면 아마도 <패선70‘s>는 명작의 반열에 오르는 드라마로 마무리 되었을지도 모른다. 비록 네 주인공의 엇갈린 사랑 이야기가 후반부에 큰 비중을 차지하긴 했지만 전후의 아픔에서 아픔을 딛고 발돋움하는 70년대까지 이어지는 우리의 역사를 정치나 그 밖의 무거운 분야가 아닌 색다른 시선으로 다시 한 번 조명하는 역사드라마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전쟁의 아픔을 딛고 일어서는 젊은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거대 담론이 아닌 개개인의 역사를 생생이 보여주는데 성공적이었기 때문이다. 80년대 큰 반향을 일으킨 KBS의 ‘이산가족찾기’ 방송처럼 전쟁의 아픔은 ‘경제적 손실’이나 ‘폐허가 된 국토’ 등 거대한 범위보다 ‘전쟁고아’, ‘가족 간의 이별’ 등 개개인에게 더 큰 것이다. <패션 70‘s>는 전쟁으로 인한 이별을 통해 이러한 전쟁이 개인에게 남긴 상처를 절실히 보여주는데 성공적이었다.

하지만 그 이후의 아픔을 딛고 일어서는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펼쳐질 줄 알았던 이야기가 갑자기 끊어졌다. 게다가 단절 끝에 이어진 결말은 보기 민망할 정도의 인위적인 해피엔딩이었다. 그래서 그 단절은 <패선 70’s>를 ‘서론만 장황히 늘어놓고 본론은 없는’ 속 빈 강정으로 만들어놓았다. 용처럼 시작됐던 이야기는 뱀 꼬리로, 그것도 끊어진 뱀 꼬리로 마무리 되었다.

시청률 때문인지(들인 공에 비하면 30% 전후의 시청률은 어찌 보면 미미하다고 볼 수도 있겠다), 제작비용 때문인지 알 수는 없다. 다만 근래 보기 드물었던 명작의 탄생을 놓친 것 같아 아쉬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