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o

한국어

시선

주변을 바라보는 차가운 눈

Can't be But, Wanna be[들개]

2006.07.27 12:58

TOTO 조회 수:835

0100005873675_00.jpg

★★★★
이외수 지음, 해냄출판사

세상과 타협하지 않겠다고 했다. 물질과 타협하지 않고, 관습과 타협하지 않고, 스스로와 타협하지 않겠다고 그 오랜 시간동안 다짐해왔다. 하지만 그 어느 누구보다 성실히, 그리고 열심히 타협하며 살아가고 있는 중이다. 나는 그렇다.

작가도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인지를 찍으며 책을 펴내는 순간 그 자신도 세상과 타협한 셈이다. 글을 쓰면서 훗날 들어올 인지세를 생각하지 않았을까? 세상의 평을 받으며 인구에 두루 회자될 자신을 상상하지 않았을까? 분명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작가 역시 마찬가지일 게다.

하지만 누구도 욕할 수 없다. 태어나자마자 타협을 보며 자랐으며, 십여년간 타협을 배워왔다. 게다가 기본적인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타협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다. 문명화된 도시에서는 그렇다. 발가벗고 수렵생활을 하며 생명을 연장할 수 없는 현재. 그래서 누구나 타협을 싫어하면서도, 타협할 수밖에 없다.

'들개'는 그래서 이상향이다. 글을 쓰는 작가 자신에게도, 글을 읽는 나에게도...성공적인 타협을 목표로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단순히 '미친개'나 '더러운 개'에 불과하겠지만, 조금이나마 타협을 거부하고자 하는 욕망을 가진 이들에게 '들개'는 너무나 부러운 존재다. 때로는 외롭겠지만, 때로는 괴롭겠지만 쉽사리 벗어나기 싫은 것은 우리의 본성에 '타협'이 본래 어울리지 않기 때문일 게다.

그래서 글을 읽는 동안 괴롭고, 부럽고, 서러웠다. 타협을 거부하면서 타협하고 있는 나를 바라보는 것은 그 무엇보다 괴로운 일이었고, 가상의 공간에서나마 타협을 거부하며 살아가는 주인공들이 너무나도 부러웠으며, 타협을 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현대를 살아가야하는 내 신세가 서러웠다. 내가 완성하고자 하는 '들개'는 무엇이며, 내가 지금 그리고 있는 '들개'는 무엇일까? 알 수 없다.

좋았다. 읽으면서 마음껏 불편할 수 있었고, 마음껏 꿈을 꾸어볼 수 있었다. 어쩌면 당장 사표를 던지고 허름한 건물을 물색하며 돌아다닐지도 모르겠다. 아니, 100% 불가능한 일이겠다. 주인공들을 붙잡는 끈은 몇 가닥이 되지 않아 쉬이 끊어버릴 수 있었겠지만, 나를 옭아매고 있는 끈들은 너무도 두텁고 그 수도 많다. 그들을 끊으려 하다간 내가 먼저 기운이 빠져 죽을 지도 모를 일이다. 친구들에게 종종 이야기하곤 한다. 가진 것이 너무 많은 것이 스스로 올가미가 되는 것 같다고. 올가미가 많아서 나는 '들개'가 될 자격이 없다. 젠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