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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 없는 자들의 슬픈 해학 [베테랑]

2015.10.13 01:15

TOTO 조회 수: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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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독 : 류승완

출연 : 황정민, 유아인, 유해진, 장윤주, 오달수, 정웅인, 정만식, 천호진, 진경, 송영창, 유인영, 배성우 

 

류승완의 영화를 좋아한다. 정제되지 않은 액션, 세상 끝에서 발버둥치는 캐릭터, 외로운 영혼들을 보면서 이종격투기에서 맛보는 것과 비슷한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다. 매운 음식을 먹은 후 데인 듯 난리치는 혀를 느낄 때, 심하게 운동을 한 후 뻐근한 느낌의 근육통이 주는 묘한 쾌감같은...

천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답다. 유쾌하고, 통쾌하고, 이야기는 단순하다. 보는 내내 짜릿하고 즐거웠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다.

자막이 올라가는 순간 드는 공허함과 씁쓸함은 좋은 영화의 여운이 주는 아련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친한 사람끼리 삼삼오오 모여 남을 실컷 험담하고 난 느낌. 사소한 오점을 어마어마하게 부풀려가며 실컷 욕하고 난 느낌. 스트레스는 마음껏 풀었지만 뒷맛이 개운하지 않다. 왜일까.

내가 경험한 재벌은 조태오(유아인 분)와 다르다. 아등바등 살 일이 없기에 유지할 수 있는 고상함과 품격, 여유가 있다. 물론 언론에서 언급했던 바와 같이 그들 사이에도 맷값을 주고 사람을 때리거나 환각파티를 일삼는 망나니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은 말 그대로 '일부'다. 대다수의 서민들이 깡패나 거지가 아니듯이. 그들 대부분은 아버지의 눈도장을 받아 더욱 많은 지분을 타내기 위해서든, 그들만의 리그에서 우위에 서기 위해서든 열심히 공부하고, 열심히 일하고, 리더로서 위엄을 갖추기 위해 노력한다. 그래서 더 무섭다. 영화처럼 개망나니가 아니라 보통의 사람보다 더 노력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고상하고 우아하기까지 하니 말이다.

현실에 존재하기 힘든 극단의 '악역'을 멋대로 만들어놓고 두 시간동안 흠신 두들겼다. 존재하지 않는 악역을 제 아무리 유쾌하고 통쾌하게 두들기면 무슨 소용인가. 마약, 자위행위와 다를 것이 무엇인가. 잠시라도 행복하면 좋은 것 아니냐는 병신같은 소리를 걷어내면...우리 사회의 재벌들은 저런 망나니들이 아니니 다행이라고 안심을 해야 할까? 그들이 조용히, 끊임없이 사회를 그들 쪽으로 기울이는 건 보지 못한 채 말이다.

통증이 겉으로 드러나는 염증이나 타박상은 보이는 것을 치료하면 끝이지만, 이들과 달리 암은 조용하고(자각증상이 늦고) 다른 세포와 동일한 패턴으로 행동하기 때문에 훨씬 무섭고 강력하다.

그들이 모두 조태오처럼 시끄럽고 번잡했으면 차라리 다행이었을 것이다. 불합리하게, 불공정하게 이 사회가 기울어져 있는 것을 모두가 알아챘을 터이니 말이다. <베테랑>. 하루하루가 갑갑한 서민들에게는 두 시간 동안의 카타르시스를 선사해 주었을지 모르지만,

이러한 해학을 위한 과장 덕분에 그들의 만행이 더욱 철저하게 가려질 듯 하여 안타까운 것은 기우일까?

마지막으로 한마디. 불의를 보고 난리치는 서동철(황정민 분)의, '쪽팔리게 살지 맙시다'란 말보다 이를 말리는 오팀장(오달수 분)의 '이 만큼 했으면 넌 할 만큼 했어. 너나 나나 자식 대학 갈 때까지 벌어야지'라는 대사가 더 가슴에 와 닿는 나이가 되었다. 소시민의 정의감이 바꿀 수 있는 것이 거의 없다는 점을 '충분히' 체험한 배나온 아저씨가 되어 버렸다.

그래도 남은 자존심 하나.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우리 자식들이지만 그들에게 '살기 위해 불의에 굴복하라'고는 절대 가르치지 않을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