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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극은 통한다[닥치고 정치]

2011.12.30 08:36

toto 조회 수: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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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어준 지음, 지승호 엮음, 푸른숲

수학의 증명방법 중 연역법과 귀납법. 불교에서 득도에 이르는 방법 중 불경공부와 선문답. 논술에서의 두괄식과 미괄식. 철학에서의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위에 나열한 것은 모두 최종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한 방법이다. 전자가 논리, 이론을 통한 방법이라면 후자는 경험이나 깨우침을 통한 방법이다. 전자는 목적지에 도달하는 속도가 빠른 대신 목적지의 근본에 대한 성찰이 부족하고, 후자는 목적지에는 좀 느리게 도달하더라도 성찰의 정도가 깊다. 전자가 멋있고 그럴듯하다면, 후자는 겉보기엔 초라할지라도 내공이 만만치않다.

나를 비롯한 웬만한 먹물(인문학을 전공한 사람들)들은 대부분 전자 쪽이다. 책을 좋아하고, 이론을 좋아하고, 권위있는 이들의 학설을 좋아한다. 왜냐? 그렇게 공부해왔고, 그렇게 깨달아왔기 때문이다. 그렇다보니 닫혀있다. 그 이론과 논리의 연장선상에서 벗어난 것들을 대할 때면 당황하고 용납을 하지 못한다.

아마도 그래서였을 거다. '나는 꼼수다'를 줄곧 들으며, 김어준의 통찰력에 대해 감탄을 하면서도 섣불리 그를 '인정'하지 못했다. 그 통찰력이 각각의 사안들에 대해 개인적인 기질에 근거한 것인지, 아니면 기저에 깔린 자신만의 철학에서 우러나온 것인지를 '나는 꼼수다'만 들어서는 판단되지 않기 때문이다. 책을 산 것도, 그것도 아주 뒤늦게 산 것도 그래서다. '계속 들어보니 이 사람 좀 괜찮은 것 같다'라는 생각이 들고, '이 사람의 이러한 면이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라는 물음이 생긴 후, '한 번 확인해 보고 싶다'라는 확신이 들고 나서야 샀기 때문이다.

책을 덮은 지금, 그에 대해 내린 결론은 그의 외모 그 자체다. 영화 '취권'에서 성룡에게 취권을 가르치는 백발의 고수, 삼국지의 방통처럼 겉은 초라해도 내공은 만만치 않다. 그의 목적지는 결국 나와 비슷하다. 하지만 그 과정을 나는 연역적으로, 이론을 통해, 논리적으로, 두괄식으로 밟았다면, 그는 귀납적으로, 그리고 경험을 바탕으로 미괄식으로 밟았다. 그가 먹물들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는 이유가 '다른 방법'을 사용했기 때문이라면, 다른 한편의 먹물들로부터 인정받는 이유는 '결국 목적지에 도착'했기 때문이다.

책 전체는 대부분 시론적이다. 지금 정치권의 사안들, 그리고 인물들에 대한 평가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그 중 그의 정치철학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 있다. 원시시대, 사바나의 초원에 빗대어 보수와 진보를 설명하는 부분이다. 지금까지 전혀 접하지 못한 해석이어서 재미있게 읽었다. 그리고 곰곰이 생각해봤다. '그럴 수도' 있다. 인문학에서의 학설이란 것이 어차피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다. 사회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Fact들을 조합해서 이치에 맞으면 학설이 되는 것인데, 그의 설명이 학설이 되지 못할 이유가 무엇인가? 거창하게 전문용어를 쓰지 않고, 복잡하게 통계수치가 들어있지 않다 뿐이지, 그의 명쾌한 설명을 읽으면서 고개가 계속 끄덕여졌다. 그리고 더 나아가 그러한 본인만의 이론을 갖고, 대중적인 진보주의자들이 순수 진보주의자들을 대할 때의 '미안함', '부채의식'까지 설명할 때 난 탄성을 질렀다. 그는 단순히 귀납적으로 목적지에 다다른데 그치지 않고, 다른 도착자들의 심리상태까지도 꿰뚫고 있었다. 나처럼 대중적인 진보주의자들이 '부채의식' 때문에 머뭇거리는 심리를 말이다.

이러한 깊은 철학과 신념을 토대로 지금의 인물들, 현상들을 명쾌하게 설명해 나간다. 또 하나의 그의 정치철학은 '정치는 논리에 감성이 뒷받침 되어야 한다'다. 이를 통해 논리에만 치우쳐 있기에 지지율이 낮은 우리나라 진보세력을 설명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박근혜가 가장 강력한 후보인 이유, 그리고 그녀를 이기기 위한 대항마가 문재인이 되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한다.

책의 표지에 '명랑시민 정치교본'라는 부제가 달려있다. 물론 일반 시민에게도 유익한 교양서로 손색이 없지만, 진짜 이 책을 봐야 하는 이는 '먹물'들이다. 논리로만 승부하려는 강성 진보 먹물들이나, 그들에게 갖는 부채의식 때문에 한 없이 쪼그라드는 대중적인 진보 먹물들, 그리고 순수만을 찾느라 대안도 없이 비판만 퍼붓는 양비론 먹물들이 꼭 봐야 하는 '필독서'다.

그가 어느 인터뷰에서 한 말이 생각난다.
질문) 당신의 생각이 편파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어준) 편파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편파적인 생각을 갖게 되기까지의 과정은 굉장히 공정했습니다.

이처럼 멋진 말이 또 있을까? 이러한 말들이 임기응변으로 튀어나온 것이 아닌, 기저에 깔린 경험과 철학에서 우러나왔다는 사실이 기쁘다. 그리고 그 경험과 철학을 확인할 수 있었던 책이 '닥치고정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