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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울한 영혼들을 향한 초혼[실미도]

2004.01.30 16:48

TOTO 조회 수:6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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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독 : 강우석
출연 : 설경구, 안성기, 허준호, 정재영, 임원희, 강성진, 강신일

2003년 최고의 흥행을 기록했던 '살인의 추억', 그리고 지금 한국 영화사의 신기록을 계속 수립해가고 있는 '실미도'. 이 둘의 공통점은 우리의 현대사에 허구를 가미하여 새롭게 해석하여 만들어낸 작품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영화를 통한 '재해석'을 놓고 봤을 때, 나에게 이 두 영화의 의의에 있어서는 분명 차이가 있다. 영화를 통한 재해석은 그 실체를 알리기 위함은 아니다. 영화라는 매체의 특성상 대중성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고, 이러한 특성은 결국 사실 이외에도 '허구'가 가미될 수 밖에 없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영화를 통한 재해석은 그 사실의 진실여부 보다는 재해석이 우리 사회에 끼칠 영향, 혹은 의의가 보다 더 의미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단순히 지금까지 진실이 규명되지 않은 '화성연쇄살인사건'을 소재로 한 '살인의 추억'은 그저 우리 사회에 있었던 사실을 다시한번 돌아본 것에 불과하다. 영화를 통해 지금까지 밝혀지지 않은 범인을 잡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 희생자들의 죽음을 애도하자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 그저 그러한 소재를 통해 영화를 만들어 봤을 뿐이다.

그러나 '실미도'에서는 다르다. 그간 존재조차 의심받아 왔던 684부대의 실체를 사회 전면에 공론화 시키는데 역할을 했다. 그리고 더 나아가 군사독재 시절에 단지 죄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철저히 인권을 유린당한 부대원들의 억울함 또한 세상으로 끄집어냈다. 언론에서는 그제서야 실미도 부대의 진상을 앞다투어 보도했고, 그제서야 우리는 오래전에 '~카더라'라고 논의했던 희미한 기억의 실체를 접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나는 영화 크레딧이 올라간 후에도 감독과 기획자들에 대한 찬사를 계속 보낼 수 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실미도'가 영화 외적인 부분에서만 의미있는 영화는 아니었다. 우선 영화속 내내 유지되는 설경구의 카리스마는 지금껏 쭉 보아왔음에도 여전히 매력있었다. 초반에 펼쳐지는 씬에서 눈을 바짝 치켜들고 손에 단도를 든 체 당당히 걸어가는 그 표정, 그 장면 하나로 난 뿅 간 상태에서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어느 인터뷰에서 '멜로 같은 역할을 맡아야 CF도 들어오는데...'라고 말한 것처럼 자칫 설경구의 이런 이미지에 식상하게 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앞서는 것도 사실이다. 가장 좋아하는 배우를 그렇게 잃고 싶지는 않은데. 이젠 국내에서 '흥행보증수표'가 되어 버린 그가 넘어야 할 또 하나의 산이 아닌가 한다. 그리고 자칫 무거운 소재, 무거운 분위기의 주인공들 덕에 내내 무겁게만 흐를 수 있는 영화의 분위기를 심심치 않게 했던 임원희를 보면서 역시 코믹물의 대가 강우석이란 생각을 했다.

그리고 상필(정재영 분)이 인찬(설경구 분)에게 건네준 손수건, 그 안에  고이 모셔진 꼬깃꼬깃한 한가치의 담배. 조상사(허준호 분)의 손에서 갈기갈기 찢어진 인찬의 어머니 사진, 그걸 겨우겨우 이어 붙여 다시 전해주는 상필. 그리고 결국 바닥에 내동댕이쳐져 버리고 만 조중사 품의 사탕봉투. 숨쉴틈 없이 밀어붙이는 영화의 전반적인 흐름 중 이 세장면에서 난 숨을 멈출 수 밖에 없었다. 아마도 군대를 다녀온 나였기에 다른 어떤 장면보다 이 세 장면이 마음에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전체적으로 괜찮은 영화, 그러나 아쉬움으로 남는 점 중 하나는 영상이다. 천연의 아름다운 자연속에서 펼쳐지는 그리고 스토리보다 영상으로 보다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내내 조금은 안일한 영상으로 전개된다. 기교가 너무 없다고 해야 할까? 물론 영상에 그리 치중을 하지 않는 강우석 감독이라는 점, 그리고 비극적인 우리의 현대사를 재조명하는 영화라는 점을 상기하고 그저 그러려니 생각 했지만 어쨋든 영화는 영상예술이기에 이왕이면 아름다운 영상을 보고싶은 욕심은 어쩔 수 없었다.

또 한가지. 왜 변을 보고 밑을 닦지 않은 느낌이랄까. 조악한 영상임에도 불구하고 박진감 넘치게 펼쳐지는 영상, 그리고 쉴틈없이 전개되는 이야기, 간간히 섞인 코믹과 감동적인 장면. '실미도'는 여기에서 끝이었다. 그럭저럭 괜찮은 듯 하면서, 영화의 의의도 꽤 괜찮게 살리는 듯 하면서도 무언가 텅 빈듯한 느낌. 영화를 보고 돌아나오면서 무언가 가득찬, 턱하고 숨막히는 느낌. 그런 그 '무언가'가 없다. 그저 피상적으로 달려만 가는 듯한 느낌이 영화 내내 지배한다. 서술에 지나치게 치중한 나머지 그 밖의 여유를 찾지 못했기에 관객이나 제작자나 마찬가지로 앞만 보고 달려가기에 바쁘다. 쉴세없이 달린 후 느껴지는 공허함.  자리에서 일어서면서 느껴지는 찝찝함은 이 때문이다. 전반적으로는 썩 괜찮은데도 무언가 부족한 느낌. 딱 2% 부족하지만, 그 2%의 공백 때문에 결국 영화는 내게 겉돌고 말았다.

아무튼 한가로운 조조에 친구와 함께 휴대폰 마일리지로 본 '실미도'. 그 덕에 잠시나마 부끄러웠던 우리의 과거, 억울했던 영혼들을 다시금 생각해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