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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

주변을 바라보는 차가운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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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독 : 한재림
출연 : 박해일, 강혜정

질척거리는 한 남자. 어엿한 애인도 있으면서 만난 지 얼마 안 된 그녀에게 ‘좋아한다’, ‘키스하자’, ‘같이 자고 싶다’며 징징댄다. 새침데기 그녀. 얼토당토않은 부탁을 하면서도 ‘좋아서 그런다’는 그 남자가 마냥 싫지만은 않다. 우리네 현실에서는 만취한 상태이거나 반쯤 미치지 않고서는 존재할 수 없는 두 남녀와 그들이 만들어가는 연애이야기. 그래서 <연애의 목적>은 로맨틱 코미디의 뉴웨이브다.

로맨틱 코미디의 정석(?)은 이렇다. 사랑에 대한 상처를 안고 있는 여성과 열정적인 남성이 우연히 만난다. 오해 혹은 적대감을 통한 갈등이 증폭된다. 갈등의 해결과 동시에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며 마무리. 각 요소를 구성하는 사건의 형태나 그 밖의 디테일이 조금씩 다를 뿐, 대부분 로맨틱 코미디 영화는 이 절차를 그대로 따른다.

하지만 <연애의 목적>은 황당한 길로 허우적대며 걸어간다. 정석(?) 로맨틱 코미디의 코미디적 요소가 서로의 오해, 우연한 사건 등에 포진해 있다면 이 작품에서 웃음은 오직 그남, 유림(박해일 분)의 퐝당한 시추에이션~ 뿐이다. 다짜고짜 ‘저 쪽에서 키스나 하자’는 둥, 머리 아프다며 그녀를 가까이 오라 해서 가슴에 얼굴을 묻고 ‘좀 살 것 같다’는 둥 현실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사이코적 행동을 천연덕스럽게 해대는 유림의 행동은 정말이지 절로 배꼽을 움켜쥐게 한다. 그리고 이렇게 황당한 개그를 자연스럽게 연출해 낸 공로의 상당부분은 배우 박해일의 것이다. 유림이라는 그 뻔뻔하면서도 순진하고, 능글맞으면서도 솔직한 아이러니한 인물을 표정 하나, 행동 하나까지 ‘그런 행동을 하고도 남을만한’ 인물에 맞게 완벽히 소화했기에 그 황당한 행동들을 ‘생뚱맞음’이 아닌 ‘자연스러운 웃음’으로 연결하는 것이 가능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 웃음이 마냥 유쾌했던 것만은 아니다. 생물학적으로든, 심리학적으로든 ‘섹스’가 사고의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남자들에게 유림의 행동은 황당해서 마음껏 웃을 수 있는 것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겉으로는 ‘쉬쉬’하는 남성들의 본능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어 ‘멋쩍게’ ‘웃을 수밖에 없는’ 것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유림이 사이코인 것은 그 인물 자체가 황당해서가 아니라, 겹겹의 가면 속에 철저히 숨기고 있어야 할 본능을 그대로 드러내어서다. 감추고 있던 치부를 드러낸 상황, 그래서 수많은 남자 관객들이 자아내는 웃음 속에는 유쾌함 뿐 아니라 멋쩍음, 부끄러움 또한 담겨 있다.

이 복잡한 웃음은 여성에게도 마찬가지다. 이미 어느 정도 알고는 있었지만 그래도 ‘모른 체 해 주어야 하는’ 그남들의 치부가 낱낱이 눈앞에 펼쳐져 있으니 허탈한 웃음밖에. 게다가 그렇게 ‘말도 안 되는’ 황당한 추파에 사르르 넘어가는 홍(강혜정 분)의 시추에이션 역시 ‘허허’ 웃어넘길 수밖에 없다. 그래서 홍을 보며 여성들이 이 영화를 불쾌하게 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남자들의 음담패설 상당 부분을 담아낸 이야기, 그 속에서 남자들의 요구대로 움직이는 홍. 그래서 여자들의 웃음은 허탈함과 동시에 약간은 모멸감도 섞여 있었을 수도.

전반부의 코믹 능선을 넘으면 영화는 제목처럼 ‘연애의 목적’ 탐구를 향해 떠난다. 사랑이 식었으면서도 ‘결혼’이라는 목적을 향해 의무적으로 달려가는 두 사람 각각의 연애는 둘의 밀애가 들통 나 깨어지고, 홍은 순수하게 ‘사랑’만을 갈구하다 상처 입은 경험도 갖고 있다. 결혼도, 무턱대고 갈구하는 사랑도 ‘연애의 목적’은 아닌 것 같다. 그럼 무엇일까? 밀애가 들통 나 만신창이가 된 두 사람. 가을을 지나 겨울이 되어서야 다시 만난다. 예전처럼 그들은 술에 진탕 취하고, 여관에서 함께 아침을 맞는다. 유림이 자신의 마음을 정리 할 유예기간으로 달라고 했던 첫 눈 오는 날. 그 둘은 아무도 밟지 않은 눈을 밟으며 길을 나선다. 다정하게 팔짱을 꼭 낀 채. 연애의 목적? 진정한 연애의 목적은 어쩌면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유림이 홍에게 고백한 것처럼 ‘좋으니까 키스하고 싶고, 자고 싶고’ 하는 것이 연애의 원인이 될 뿐이다. 사귀는 사람이 있었어도 좋아하는 이에게 자신의 감정을 솔직히 고백하고, 자신을 파멸로 이르게 했던 그녀와도 함께 첫 눈을 밟을 수 있는 유림. 유능한 애인 대신 솔직한 마음을 고백한 유림을 선택한 홍. 그들이 두 시간 동안 말하는 것은 결국 ‘연애의 목적은 없음’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