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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분자의 진실[나의 정치학 사전]

2005.09.26 15:19

TOTO 조회 수: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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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제 : 살아있는 교양, 살아있는 정치이야기
강준만 지음, 인물과 사상사

어렸을 때 나는 강준만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그의 매끄럽고도 격정적인 글을 재미있게 읽으면서도 말이다. 자신만의 절대적 신념을 세우고 그것을 열정적으로 추구하는 것을 '정의', '멋'으로 치부하던 시절. 그 시절 나에게 강준만은 '회색분자'요, '기회주의자'였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절대적 신념'이 없는 것으로 보였다. 어제 그토록 옹호하던 인물을 오늘 가차없이 비판하는가 하면, 양비론을 일삼으며 '비판을 위한 비판'을 즐기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내가 '정의'롭게 생각하고 '멋'있게 여기는 면이 그에게는 없었기에 다른 사람들처럼 그의 글들을 가볍게 소비하고는 구석에 쳐박아 뒀었다.

하지만 조금씩 세상을 더 알아가면서, 잡념이 늘어가면서 과거의 내가 생각했던 '정의'는 단지 '멋'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여겨지기 시작했다. 이 세상에 절대적인 진리, 절대적인 참이 존재할까? 현대에 도덕적이라고 여겨지는 것들이 과거, 심지어는 동시대 다른 공간에서조차 비도덕적으로 간주되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가. 참이 거짓으로 탈바꿈하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가. 일부일처제라는 인류학적 담론부터 민주주의, 자본주의 등 정치경제학적 담론까지, 성서 원리주의 등 종교적 담론까지 참과 거짓, 선과 악, 도덕과 비도덕의 경계를 넘나드는 예는 일일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한 분야에 막강한 헤게모니를 갖는 이데올로기나 이론이 존재하는 것은 우리의 바람, 혹은 좀 더 세상을 쉽게 설명하고픈 학자의 욕심에 의한 허구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회색분자는 '기회주의자'가 아닌 불가피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이러한 생각을 하게 된 이후 처음 접한 강준만의 저서가  이 책이다. 그는 서두에서 현실과 괴리된 채 홀로 침잠해가는 '학문을 위한 학문'에 비판을 가하는 동시에 다른 학문과 연계할 줄 몰라 현상을 설명하는데 애를 먹고 있는 학자들의 태도에도 회의를 품는다. 그리고 그 대안으로 '현상과 이론을 이야기할 뿐 아무것도 결론 짓지 않는' 이 책을 펴낸다고 적고 있다.

정치, 경제 등에 관련된 여러 용어를 설명하는 방식으로 이 책은 서술되고 있다. 용어의 연원을 이야기한 다음 그와 관련된 현상, 그에 대해 펼쳐진 다양한 논의를 실어 작가가 전면에 내세웠던 '살아있는 교과서'를 구체화한다.

이 책의 가장 뛰어난 점은 작가의 중립성이다. 물론 현안에 따라 작가의 견해가 드러나는 부분이 간혹 눈에 띄기도 하지만 비판과 옹호 두 견해를 고루 실어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않으려는 노력이 엿보인다. 작가 스스로 결론을 내리지 않아 독자가 비판적으로 읽을 수 있는 여운을 남겨 '사전'이라는 이 책의 명분을 지키고 있다.

간혹 인용문이 너무 많아 지루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작가가 쉽고 매끄럽게 글을 쓰는 능력이 출중하기에 전체적으로는 책장이 쉽게 넘어가는 편이다. 정치, 경제라면 질색을 하는 이들, 숱하게 등장하는 '-ism' 때문에 인문, 사회과학에 학을 띄는 이들에게 편안한 교양서로 안성맞춤인 책이다. 가벼운 재질의 종이를 사용해 책 크기에 비해 무게가 가벼운 것은 또 하나의 보너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