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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

주변을 바라보는 차가운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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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1회 세계문학상(세계일보) 수상작
김별아 지음, 문이당

역사소설은 우리에게 두 가지의 즐거움을 선사한다. 하나는 우리의 머릿속에 인물이나 사건 등을 통해 피상적으로 인식되어 있는 과거를 생생히 살아나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일정 부분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이야기들이기에 어쩌면 ‘진실일 수도 있는’ 개연성 있는 인물과 사건으로 이루어져 설득력 있는 판타지를 선사하는 점이다. 그리고 이 점에서 <미실>은 썩 괜찮은 역사소설이다.

실제로 조선시대 이후로 우리 사회를 강력히 지배해 온 유교적 전통 때문에 고려시대 까지도 궁궐에서 있었던 근친혼은 우리에게 무척이나 생소하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왕족의 혈통을 보전하기 위해서’라는 피상적 명제 하나 뿐이다. 그런 우리에게 <미실>은 신라시대 가치관을 통해 그 피상적 인식을 생생한 역사적 현실로 재인식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소설 속에는 미실 뿐 아니라 등장인물 간에도 무수한 근친혼이 등장한다. 오죽하면 책의 시작이 그 복잡한 관계를 그림으로 나타낸 가계도이겠는가? 하지만 책을 읽으면서 문란하다거나 비도덕적이라는 생각이 그다지 들지 않는다. 소설 내내, 물론 도덕과 제도도 있지만 신라인들에게 가장 중요시 되는 것은 아름다움을 칭송하고 동경하는 본능적인 사랑임을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제도와 도덕에 묶여 본능을 속이며 살아가는 것처럼 불행한 삶은 없다고 그들은 말한다. 어쩌면 무수한 틀에 묶여 사는 우리네 삶보다 그들의 삶이 보다 인간적이고 낭만적인 삶이 아닌가싶다. 가족제도, 경제력, 학벌, 직업 등 ‘사랑’을 지상 최고의 가치로 칭송하면서도 우리는 스스로를 너무 많은 요소로 묶어놓고 있는 것이 아닐까? 우리에겐 충격과 경악을 가져다 준 <올드보이>를 신라인들은 어떻게 봤을까? 세상에 존재하는 여러 사랑 중 하나라고, 그래서 대수와 미도는 계속 사랑해야 한다고 하지 않았을까?

그러한 신라사회였기에 미실의 삶은 파란만장할 수 있었다. 자신이 타고난 미모와 지성에 대한 자부심으로 충만했던 유년기, 사랑을 좇아 무작정 내달렸던 청년기, 미모를 이용해 권력을 탐했던 장년기, 그리고 세상의 이치를 깨달아 현명한 삶을 살아가는 말년(물론 여기에서 구분한 시기를 현대의 기준으로 보면 안된다. 당시 첫 애를 낳는 나이는 대부분 14, 15세이니 말이다). 작가는 이러한 미실의 삶을 그리며 독자를 계속 채근하는 것 같다. 당신은 진정한 사랑을, 삶의 목적을 찾았는가. 당신은 어떤 삶을 살고 있는가. 황제에게 색(色)의 즐거움을 선사해야 하는 운명을 타고난 미실은 끊임없이 마음의 문과 몸의 문, 그리고 사랑, 삶을 연관지어 스스로에게 질문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네 모두의 삶도 이렇게 파란만장했던 천 년 전 미실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절로 깨닫게 된다.

무수한 고전 시가와 문구의 인용, 생생히 사용되는 당시 용어는 이 소설에 작가의 땀이 얼마나 배었는지 절로 짐작가게 한다. 또한 영웅의 서사시, 조선시대가 배경인 작품이 대다수인 역사소설 장르에서 여성을 주인공으로, 신라시대를 배경으로, 사랑과 성(性)을 중심소재로 했다는 점은 이 작품의 참신함이 돋보이는 요소다. 그러나 지나치게 많은 인물이 등장하다보니 작품을 읽는 중간 중간에 앞의 가계도를 찾아봐야 하는 번거로움이 따른다. 소설의 흐름에 별 영향이 없는 인물들을 과감히 생략하면 좋았을 텐데 작가가 팩트의 압박에 견디지 못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뿐만 아니라 특별한 계기도 없이 삶의 자시게 변해 있는 말년의 미실은 읽는 이를 당황스럽게 한다. 사랑만 좇던 미실이 갑자기 인자한 어머니의 이미지로 바뀐 건 왜일까. 게다가 잠시 미실의 애인이었을 뿐인 설원랑이 미실을 대신 해 죽은 것은 또 무슨 연유인가. 미실에 대한 순종적 사랑으로 평생을 살았던 세종이라면 모를 일이지만 말이다. 이름조차 가물가물하던 그가 그토록 미실을 사랑한 것은 작품 끝에서 황당하게 알았다.

지금 우리를 짓누르고 있는 제약을 벗어나 자유로운 사랑을 경험하고 싶다면, 파란만장한 여성의 삶을 통해 신라의 공기에서 숨쉬어보고 싶다면 <미실>은 최고의 가상공간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