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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을 바라보는 차가운 눈

넋두리에 그치다 [82년생 김지영]

2017.08.29 00:10

TOTO 조회 수: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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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남주 지음, 민음사

 

한겨레21의 도서 소개 코너에 인용된 이 대목에 이끌려 책을 주문했다. 

"나 원래 첫 손님으로 여자 안 태우는데, 딱 보니까 면접 가는 거 같아서 태워 준 거야"

태워 준다고? 김지영 씨는 순간 택시비를 안 받겠다는 뜻인 줄 알았다가 뒤늦게야 제대로 이해했다. 영업 중인 빈 택시 잡아 돈 내고 타면서 고마워하기라도 하라는 건가. 배려라고 생각하며 아무렇지도 않게 무례를 저지르는 사람.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항의를 해야 할지도 가늠이 되지 않았고, 괜한 말싸움을 하기도 싫어 김지영 씨는 그냥 눈을 감아 버렸다.

익숙하면서도 담담하게 서술된 문구라서 끌렸다. 그리고 어제는 SBS에서 이 책을 소재로 한 다큐멘터리를 봤다. 아직도 편견과 차별이 존재하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80년대에 태어난 여러 '지영'이들의 삶을 나직히 담았다고 했다. 호기심이 일었다.

타인에게 빙의를 하는 증세를 보이기 시작한 82년생 김지영씨, 그녀를 상담하며 들은 내용을 정신과 의사가 서술하는 형식이다. 김지영이라는 가상인물의 이야기지만 여성의 차별과 편견에 대한 기사와 통계가 많아 마치 인터뷰가 실린 기사를 읽는 것 같다. 구성과 내용은 간결하고 군더더기가 없다. 시작부터 끝까지 단숨에 읽힌다. 

하지만 읽는 내내 불편하다. 그 이유를 곰곰이 생각했다. 이유는 딱 두 가지다. 남녀차별에 있어 김지영씨의 대척점에 내 삶이 존재한다는 점, 그리고 그러한 '만인대 만인의 투쟁'은 아무 것도 해결하지 못한다는 내 믿음 때문이다. 

김지영씨의 억울한 삶은 5살 어린 남동생과의 차별에서부터 시작된다. 모든 것에서 우선순위인 남성과 그 주변에 밀려나 있는 여성. 하지만 이러한 과도하고 선명한 차별은 둘 모두에게 상처가 된다. 차별을 받은 여성은 점점 소극적이게 되고, 울분을 삭이며 살게 되는 한편, 대척점의 남성은 그들이 누리는 혜택과 함께오는 책임감, 강해져야 한다는 기대를 지고 살아야 한다. 남자는 외향적이어야 하고, 울지 말아야 하며, 정신적으로나 신체적으로 강해야 하는 동시에 주변 사람들을 끝까지 책임져야 한다는 강박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 

90년대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MBC드라마 '아들과 딸'에서도 극단적 차별을 겪으며 꿋꿋이 자란 후남(김희애 분)보다 그 어마어마한 짐을 끝내 이기지 못하고 나약하게 살아가는 귀남(최수종 분)에게 시선이 더 갔던 것도 비슷한 이유다. 챙김과 책임을 고르게 분배하지 못한 결과는 여성 뿐 아니라 남성에게도 불행할 수밖에 없다. 

이래서 '여성의 적은 남성'이라는 단순한 논리는 위험하다. 택시 기사가 내뱉은 말은 그 불균형적인 분배 속에서 사회화 된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남성우월주의 속에서 가치관을 형성한 수 많은 '꼰대'들 때문에 여성이 차별받는 다는 말은, 범죄자를 모두 사형시키면 깨끗한 사회가 될 것이란 믿음만큼 어리석다. 

사회안전망이 붕괴된 사회, 사오정이나 오륙도도 이제 옛 말이 되어버린 사회, 그 와중에도 여성이 겪는 차별 만큼이나 '가정을 책임져야 한다는 강박'을 안고 살아가는 남성. 과연 자신의 삶 조차 제대로 유지하기 힘든 사회에서 남성이 여성이 겪는 차별까지 생각할 여유가 있을까? 

'씹다 버린 껌'이란 입에 담기 힘든 여성 비하 발언을 일삼는 남성들을 옹호하는 게 아니다. 그들의 비뚤어진 사고와 언행은 비난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벼랑 끝까지 몰린 삶을 살아가고 있는 이들에게 타인의 차별까지 생각하라는 공자 말씀 같은 주장이 오롯이 귀에 들어올리 만무하다. 그보다는 모두가 편안하고 행복하게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사회, 모두가 바르고 정의롭게 교육받을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 근본적인 해결책일 것이다. 이러한 근본적인 해결 없이 꼰대 같은 남성만 비난한다면, 그 꼰대 같은 남성들도 자신의 각박한 삶에 대한 분노의 화살을 여성에게 돌릴 가능성만 높아질 뿐이다. 

여성의 적은 남성이 아니다. 그들을 비뚤어지게 사회화 한 가부장적 문화, 그리고 그들의 삶을 벼랑 끝으로 몰고 있는 각박한 사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