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8.07 10:53
★★★★★
이민진 지음, 신승미 옮김
왜 제목이 '파친코'일까. 책을 읽으면서도 단순히 등장인물이 파친코에서 일을 한다는 것 때문에 제목을 '파친코'로 정한다는 것이 이상했다. 책을 다 읽어갈 즈음, 내 의문은 자연히 해소됐다. '파친코'는 간단하면서도 핵심을 깊숙히 찌르는 최고의 제목이었다.
이 소설은 일제강점기를 살아내는 서민의 삶을 '양진 - 선자 - 노아와 모자수 - 솔로몬', 4대에 걸친 한 가족의 이야기로 담담히 그려낸다. 장애를 가졌지만 성실하고 자상한 훈과 결혼한 양진은 딸 선자를 낳는다. 부모님을 열심히 돕는 성실한 딸로 자란 선자는 부산과 오사카를 오가며 사업을 하는 한수를 흠모하고, 그의 아이까지 갖게 된다. 그러나 임신 후에야 한수가 유부남인 걸 알고 헤어진다. 한편 양진의 하숙집에서 신세를 지던 이삭은 은혜를 갚는 마음으로 선자와의 결혼을 결심하고, 결혼 후 형이 지내는 오사카로 선자와 함께 건너간다. 형 부부와 함께 삶을 꾸리던 이삭과 선자는 노아(생부는 한수)와 모자수를 낳는다. 공부를 잘하던 노아는 와세다대학에 입학하고, 공부에 흥미가 없던 모자수는 일찌감치 파친코에서 일을 하며 부를 쌓는다. 그러던 중 노아는 본인의 생물학적 아버지가 한수임을 알게 되어 절망에 빠진 나머지, 학교를 중퇴하고 가족과도 연락을 끊는다. 한수는 완전히 낯선 곳에서 새 삶을 꾸린 노아를 결국 찾아내고 선자에게 알려준다. 선자가 노아를 찾아가 인사한 다음날 노아는 자살한다. 한편 모자수는 파친코 사업을 계속 확장하며, 아들 솔로몬을 미국으로 유학보낸다. 그러나 일본인 동료들에게 배신당하며 상처를 입고 결국 아버지 모자수의 회사(파친코)에서 일하게 된다.
파친코는 개인의 중독을 통해 돈을 버는, 타락과 건전함의 경계에 존재하는 사업이다. 또한 일본에 있는 조선인들, 즉 경계인들이 부를 쌓을 수 있는 유일한 직업이기도 하다. 이를 외면한 채 공장에서 일본인 밑에서 일한 요한(이삭의 형)은 평생 가난을 면치 못했고, 사회운동을 하던 목사 이삭은 감옥에서 당한 고문의 여파로 죽는다. 노아는 와세다대 입학을 통해 신분상승을 꿈꿨지만 생물학적 아버지와 길러준 아버지의 경계에서 방황하다 결국 파친코에 종사하게 된다. 동생 모자수는 평생 파친코에서 성실하게 일하며 사업을 확장하지만 사회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건 마찬가지다. 모자수의 아들 솔로몬 역시 해외유학, 투자은행 입사를 통해 신분상승을 꿈꿨지만 결국 아버지의 사업을 물려받게 된다. 경계인으로 태어난 재일조선인은 그 신분을 탈출하기 위해 몇 대에 걸쳐 노력하지만, 결국 경계선(타락과 건전함의)에 있는 파친코에서 일하게 된다. 경계인이 종사하는 경계의 직업, 파친코는 일본땅에서 경계인으로 살아가는 조선인의 운명을 의미한다.
모든 문장에 군더더기가 없고, 서사의 전개속도는 무척 빠르다. 작가의 힘인지 번역가의 노력인지 모르겠지만, 덕분에 책을 집어든 순간부터 독자를 매섭게 빨아들인다. 장소, 인물, 심리의 세세한 묘사가 없이, 인위적으로 아름답게 꾸미는 문장이 없이 알차게 욱여넣은 이야기만으로도 걸작 소설이 될 수 있음을 알려준 작품이다. 무게나 깊이는 차이가 나지만, 김진명의 소설 같은 느낌도 준다. 덕분에 올 여름휴가를 알차게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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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작가의 다큐멘터리를 봤다. 수많은 재일한국인을 인터뷰했고, 일본에서 주류에 들지 못한 채 버텨내는 한국인들을 그리고 싶었다고 한다. 파친코 역시 재일한국인이 신기하게도 많이 종사하는 직업이어서 주요 소재가 되었다고 했다.
철저히 그들의 실체를 이야기로 풀어낸 소설인데, 이를 단순히 '기법'으로 생각하니 해석과 감상이 작가의 의도와 많이 멀어졌다. 하지만 수정하거나 지우지 않겠다. 이 역시 나의 일부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