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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메이크(Remake)

2004.11.07 23:26

이현국 조회 수:543

어렸을 때 난 별난 취미 덕분에 어머니께 야단 맞은 적이 있다. 거의 한 달마다 방의 가구 배치를 바꾸는 요상한 취미. 내 방에 가구라고 해 봐야 책생, 책꽂이, 옷장 뿐이었건만, 그 단순한 요소들로 참 다양한 조합을 만들어냈다.  월례행사를 치루듯 땀을 흘리며 그토록 낑낑댔던 이유. 아마도 권태로움을 무척이나 싫어하던 나였기에 그 탈출구 중 하나로 그렇게 가구배치를 바꾸지 않았나 싶다. 단순한 요소들로 새로운 조합을 만들어내는 창조의 기쁨도 만끽하면서 말이다.

리메이크란 말 그대로 기존에 있던 어떤 것을 다시 만든다는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이 단어에는 '반복'의 의미보다는 '재창조'의 의미가 더욱 강하게 담겨있다. 단순히 기존에 존재하던 것을 다시 만드는 것이 아닌 작가의 창조력을 가미하여 새로운 작품으로 탄생시키는 것. 이 때문에 리메이크는 무척 어려운 작업이다. 명작의 반열에 오른 작품 정도는 되어야 그것을 재창조 하고 싶은 욕구와 그에 대한 수요가 있을 것이며, 명작에 오른 만큼 이미 뛰어남을 인정 받은 작품을 새롭게, 그러나 기존 작품의 맛은 살리면서 더 훌륭한 작품으로 탄생시키기란 그리 녹록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나라당, 그리고 창당되었다고는 하나 기존의 정당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열린우리당. 이렇게 기존의 틀은 그대로이지만 그 구성이 거의 '재창조' 된 17대 국회의 리메이크에도 난 많은 관심과 기대를 가졌었다. 하지만 그들 역시 '재창조'가 아닌 '재탕'에 불과함을 실감하는 중이다. 비판 보다는 비난이 앞서는 국회, 시급한 민생 법안의 처리 보다는 정쟁에 열 올리고 있는 국회.  이렇게 정쟁과 상호비방 등 기존의 '작품'들은 전혀 재해석되지 않고 그대로 모방되고 있다. 자신이 속한 당 의견에 맞서면서까지 소신을 굽히지 않았던 존.F.케네디와 같은 리메이크 된 국회의원의 모습을 기대했었지만 17대 의원들에게 그런 '창조성'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 덕분에 우리는 수십년간 재탕 되어 온 국회의 재탕을 또다시 지켜볼 수밖에 없다.

창조력이 부재한 리메이크는 결국 허구다. 그 조그만 방의 가구를 재배치 하는 것도 수없이 배치도를 그려보며 새로움과 효율성을 고려한 끝에 이루어졌는데 정치권의 리메이크는 너무나 무성의한 졸작들만 양산해내고 있다. 이 모두 리메이크를 '재탕'으로 여겨 가볍게 달려든 결과다. 정치라는 거친 물결을 가볍게 보고 뛰어 들었다가, 모두 그 물결에 휩쓸리는 꼴이다. 창조력 없이 그 물결을 바로 잡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기에 창조력 없는 리메이크는 허구다. 분명 리메이크는 창조만큼이나 어려운 작업이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