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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

주변을 바라보는 차가운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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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쓰메 소세키 지음, 유유정 옮김, 문학사상사

이 작품은 1905년부터 1907년에 걸쳐 쓰인 소설이다. 하지만 100년이 지난 지금 읽어도 전혀 촌스럽거나 구시대적이지 않다. 오히려 최근의 소설만큼, 아니 그 이상 재미있다. 게다가 주인공인 고양이가 바라보는 시선 속에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조차 뜨끔하게 할 정도의 촌철살인적인 면이 있다.

작가 나쓰메 소세키는 일본에서 신처럼 추앙받고 있는 소설가다. 그가 그토록 명성을 날릴 수 있었던 이유는 여느 명사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시대 속에서 그 시대를 바라보는 것이 아닌, 자신의 공간을 벗어나서 그 공간을 바라볼 수 있는 눈이 있기 때문이다. 작가가 살던 시대의 일본은 막 서구 문물을 수용하여 거기에 온 나라가 열광하고 있던 때다. 이토 히로부미는 끊임없이 연기를 내뿜는 공장을 보며 긍지를 느끼고, ‘탈아론’이 신앙처럼 받들어지는 시대. 그 시대를 살아가면서 맹목적인 서구화를 비판하고, 아시아적 가치를 통한 문명의 발전을 갈구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렇기에 나쓰메 소세키는 중국의 루쉰과 더불어 ‘아시아의 근대’를 짊어 졌던 선구자로 추앙받을 수밖에 없었다.

여기 너무나도 똘똘한 고양이 한 마리가 있다. 인간의 언어를 구사할 수는 없지만 알아들을 수는 있는. 이름도 없는 그 고양이는 주인의 집에서 일어나는 소소한 사건들을 통해, 인물들의 성격, 일본의 문화, 그리고 사상 까지도 넘나들며 기술하고 있다. 그의 눈을 통해 본 등장인물들은 제대로 된 인물이 없다. 고집쟁이인데다 사교성과 융통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주인 구샤미, 허풍쟁이 메이테이, 잡스러운 연구에 몰두하는 간게쓰 등 이들 인물들은 어디 하나 인간다운 면모가 없는 단편적인 인물들로 묘사된다. 물론 이는 고양이를 통해서 바라본다는 이 소설의 기본 설정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것이기는 하지만, 어찌 보면 서구 문명을 추구하는 시대의 인물들은 이렇게 단편적일 수밖에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물질이라는 하나의 가치관을 향해 돌진하는 시대의 만상. 그 시대를 살아가기 위해서는 단편적이어야 할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네의 운명일지도 모른다. 구샤미처럼 계속 변해가는 시대를 벗어나 혼자만의 세상에 묻혀 살던가, 아니면 메이테이처럼 허풍으로 타인들을 속여 가며  세상을 살던가, 간게쓰처럼 명분 없는 집착 속에서 살아가던가, 다타라처럼 자본의 순리 속에서 살아가던가.

하지만 구태여 작가가 소설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찾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이 소설은 이야기 자체로 흥미진진하게 엮어지기 때문이다. 먹은 떡이 입에 붙어 춤을 추는 고양이를 묘사하는 장면이나, 동문서답 식의 엉뚱한 구샤미의 문답들. 마치 시트콤의 장면처럼 개연성 있는 이야기의 흐름은 아니더라도 각각의 장면에서 재미를 맛볼 수 있다. 그리고 그 속에서 문득 문득 보이는 우리들의 어리석은 모습들을 발견하고 흠짓 놀라면 그것만으로 이 소설은 충분한 가치가 있다. 그리고 그러한 맹목적인 시대를 살아가는 선구자의 답답한 심경을 조금이라도 느낀다면 더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