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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

주변을 바라보는 차가운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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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살아가는 낙 중 하나가 '익숙한 이름들과 실제로 만나기'다. 내가 열린 문화를 접할 수 있었던 시기를 대학 입학 후인 1997년으로 본다면, 그때부터 지금까지 내 귀에는 실로 무수한 '익숙한 이름들'이 머물다 흘러가곤 했다. 젊음의 취기를 문화의 향기보다는 사람사이에서 부대끼는 걸로 담아버렸던 그때. 그때의 익숙한 이름들을 이제서야 접하면서 느끼는 즐거움이 요즘의 불안하고 나태한 내 삶에 즐거움을 가져다주고 있다.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 역시 젊은날에 귀에 익숙했던 이름이었고, 뒤늦은 만남을 통해 다가갈 수 있는 이름이었다. 초간된지 10년, 하지만 만남속에서 만난 희열은 10년만큼 낡지 않을 뿐더러, 오히려 나에게 새로움을 더해줄 수 있는 미풍 같았다.

최근 소위 잘나가는 논객 중 하나인 홍세화씨를 존재하게 한 저작이나 다름없는 이 책은 1980년대 '남민전사건'으로 프랑스에 망명할 수 밖에 없었던 그의 자서전적인 내용, 그리고 낯선 타국인 프랑스에서 느꼈던 그들의 정신 '똘레랑스'에 관한 이야기의 커다란 두 줄기를 갖고 전개되어간다. 우리 말로는 '관용'정도로 해석될 수 밖에 없는 말이지만 똘레랑스(tolerance)는 우리의 '정(情)'처럼 단순히 한마디로 정의될 수 없는 말이다. 차이를 인정할 줄 알고,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서로를 존중할 줄 아는 정신. 혹은 일정한 기준에 얽매이기보단 상황에 따른 여유를 용인할 줄 아는 정신이 '똘레랑스'라고 필자는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내용을 지겹게 나열하기보다는 그가 오랫동안 프랑스에서 망명인의 이름으로 살아가면서 겪은 일상의 에피소드를 통해 간접적으로 이야기하기에 보다 쉽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그리고 프랑스인들의 똘레랑스를 볼 때마다 독자로 하여금 흐뭇한 미소를 지을 수 있게 만드는 것 또한 이 책의 매력이다. 이러한 똘레랑스는 필자가 우리나라에서 겪은 '똘레랑스적'이지 않은 일련의 사건들과 대비되어 더욱 선명하게 부각된다. 똘레랑스가 부재한 우리사회에 대한 연민은 이러한 대비효과 때문에 더 크게 다가온다.

필자도 염려했던 것 처럼 나 역시 이 책을 다 읽은 후 '너무 프랑스 사회를 미화시키지는 않았나'하는 생각을 했다. 힘들때 겪은 조그마한 호의는 더욱 크게 느껴지는 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과론적으로 미화를 했든, 하지 않았든 크게 문제되는 거은 아니다. 그것이 과장이 되었을지라도 분명 프랑스인들의 똘레랑스는 우리에게는 없는 또 하나의 배울만한 정신이기 때문이다. 전여옥씨의 '일본은 없다'처럼 단순히 자신의 배설 욕구만을 충족시키는 글 보다는 우리에게 훨씬 유용하고 값진 기록이 아닐까?

너무나 아쉽다. 2002년 7월말에 일주일간 머물렀던 프랑스. 이 글을 읽고 난 뒤에 갔었더라면 그저 담담하게만 느껴졌던 프랑스를 색다르게 느낄 수도 있었을텐데 말이다. 요즘 무슨 말이나 행동을 할때면 머리속에 항상 '똘레랑스'라는 단어을 떠올리며 조심하게 된다. 아마도 얼마간은 심한 부작용에 시달릴 것 같다.